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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착각하지 마라







정진홍
논설위원




# 그제 오후 8시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무대 위에는 피아노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무대 옆 출입구가 열리자 연주복을 갖춰 입었지만 더벅머리 소년 티가 채 가시지 않은 이가 앞을 볼 수 없어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그는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한 후 피아노 앞에 바싹 다가앉았다. 건반 양 끝을 재 보듯 팔을 뻗친 후 건반 중앙부에 손을 올려놓은 그는 이내 연주를 시작했다. 곡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17번 일명 ‘템페스트’였다.



 # 그런데 연주자가 머리를 쉼 없이 좌우로 흔드는 것이 눈에 거슬려서인지 듣는 데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 더한 몸동작을 취하는 피아니스트가 수없이 많겠지만 정말이지 그의 특이한 머릿짓은 종잡을 수 없었다. 변명 같지만 그것에 신경 쓰여 음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순간 눈을 감고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예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때부터 정말이지 신기할 만큼 소리가 명징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새삼 깨달았다. 얼마나 많이 또 너무나 자주 나 스스로 ‘보여지는 것’에 현혹되는가를.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17번 일명 ‘템페스트’는 베토벤이 귀가 멀기 시작해 절망의 늪에 빠져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쓸 즈음인 1802년 작곡했다. 베토벤의 조수였던 신들러가 이 곡을 이해할 단서를 달라고 하자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폭풍우)’를 읽어 보라고 했다는 말 때문에 ‘템페스트’라는 별칭을 얻게 된 곡이다. 본래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는 왕위를 동생에게 빼앗긴 형이 폭풍우 속에서 표류하게 된 외딴섬에서 마술의 힘으로 원수들을 꾀어내 유인하지만 결국엔 증오와 분노를 내려놓고 화해와 사랑으로 승화시킨다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상실과 박탈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 아마도 베토벤은 자신에겐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청각의 상실과 박탈을 분노로만 대응하길 그치고 그것을 넘어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열겠다는 각오로 피아노 소나타 17번을 작곡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200여 년 후 아예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피아니스트 쓰지이 노부유키(辻井伸行)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2년 전인 2009년 스무 살 때 반 클라이번 국제콩쿠르에서 중국의 피아니스트 장 하오첸과 공동 우승한 바로 그 사람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쓰지이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시각의 상실이 뭔지 모르고 박탈은 더더욱 모른다. 시각이 있어 본 경험 자체가 없어 불편하다는 생각조차 없다. 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주저하지도 않는다. 승마 경험이 전혀 없던 그였지만 미국의 한 농장을 방문했을 때 곧바로 말 등에 올라 한 시간 이상 달렸을 만큼 겁이 없다. 본래 뵈는 게 없으면 겁도 없다지만 점잖게 말하면 그만큼 도전을 즐긴다. 눈을 감고 그의 피아노 소리를 들어 보면 안다. 그에겐 상실이니, 박탈이니 하는 관념 자체가 없다는 걸! 대신 그는 음악을 반복해 듣고 그것을 통째로 암보해 그 자신만의 도전적인 기운을 담아 타건하는 자유롭고 대범한 영혼일 뿐이다.



 # 반면에 요즘 우리는 너무 쉽게 상실에 대해 말하고 너무 빨리 박탈에 대해 분노한다. 그리고 스스로 비웃는다. 그만큼 사회는 빠르게 자조(自嘲)화되어 간다. 정치가, 있는 자가, 이른바 지도층이 그런 상실감과 박탈감을 부추긴다. 하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냉정하게 보면 우리 스스로 착각하는 대목이 없지 않다. 꿈을 가져 본 적이 없는데 꿈의 상실이 있을 수 없다. 포부를 가져 본 바가 없는데 좌절과 박탈이란 것도 거짓이다. 꿈조차 갖지 못하게 하고 포부조차 쭈그러들게 만드는 사회가 밉지만 그 탓만 할 건 아니다. 애초에 갖지 않고 품지 않은 것에 대한 가짜 상실과 거짓 박탈이 내게는 없었는지 쓰지이 노부유키를 다시 보며 생각해 보면 어떨까.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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