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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스페셜 - 목요문화산책] “저주 받을 창조자여, 어찌 생명을 갖고 … ”





문소영의 명화로 읽는 고전 영화 ‘혹성탈출’ 계기로 본 19세기 『프랑켄슈타인』



그림 ② 악몽 (1781년), 헨리 퓨슬리 (1741~1825) 작, 캔버스에 유채, 101.6×127cm, 디트로이트 미술관, 미국 디트로이트





최근 국내 관객 250만 명을 돌파한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고전 SF 영화 ‘혹성탈출’(1968)의 프리퀄(그 이전의 이야기를 다룬 속편)로서뿐만 아니라 독립된 작품으로서도 뛰어나다는 평이다. 동물 실험의 여파로 높은 지능을 얻게 된 침팬지가 정체성을 고민하고 인간에게 반기를 드는 과정을 매우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그런데 인간의 과학기술로 지력(智力)이 생긴 새로운 존재가 인간을 위협하는 이야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인공지능 로봇이 나오는 영화 ‘아이, 로봇’(2004), 복제인간이 나오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계보의 시작에는 메리 W 셸리(Mary W. Shelley·1797~1851)의 소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1818)이 있다.





이미 아는 사람들도 자꾸 잊어버리게 되는 사실이지만, 프랑켄슈타인은 거구에 깍두기 머리를 지닌 인조인간의 이름이 아니라, 그를 창조한 젊은 과학자의 이름이다. (깍두기 머리 역시 영화 때문에 굳어진 이미지고, 원작 소설에서는 긴 산발머리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어릴 때부터 생명과 죽음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그게 더 심해져서 결국 대학에서 생명 창조 실험을 하는 데 이르렀다. ‘혹성탈출…’의 과학자 윌이 아버지의 알츠하이머 병 때문에 치료제 실험을 반복하다 인간보다 똑똑한 침팬지 ‘시저’를 얻게 된 것처럼.



 다른 점이 있다면 시저는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인 반면에, 프랑켄슈타인의 인조인간은 처음부터 목표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창조자들은 모두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인간 수준으로 생각할 수 있는 피조물이 나오면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제1원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처럼 그 피조물이 독립된 자아(自我)를 지닌다는 것을, 창조자의 생각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비극이 시작된다.









그림 ③ ‘프랑켄슈타인’(1931년) 포스터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납골당에서 사람의 뼈를 모으고 해부실과 도살장에서 조직을 모아 인체를 만든 다음 전기 충격을 주어 생명을 불어넣었다. 19세기 초 소설의 한계로 이 과정은 그저 애매모호하게 묘사돼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나올 만큼 당시에 이미 해부와 전기 실험이 성행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실, 바로크 미술의 거장 렘브란트 판 레인의 작품(그림 ①)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17세기부터 해부학 강연은 인기가 많았다.



 암스테르담 외과의사 조합의 주문으로 그려진 이 단체초상화를 보면, 조합원들은 당대 해부학의 권위자 툴프 박사를 초청해 강연을 듣는 중이다. 검은 옷을 입은 툴프 박사와 외과의사들의 위엄 있는 모습이, 발가벗겨진 채 빛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창백한 시신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며칠 전만 해도 의사들과 같은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의사들의 수업 도구 신세가 된 이 사나이는 강도죄로 강연 당일 아침에 교수형을 당했다. 이렇게 과거에는 사형수의 시신으로 해부실의 수요를 해결하곤 했다. 그런데 19세기에 오면 공급이 모자라 의사가 시신을 도굴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빅터 역시 생명 창조의 열망에 사로잡혀 별 죄책감 없이 도굴한 시신을 이용해 인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완성된 인간이 미라 같은 피부에 “흐리멍덩한 노란 눈을 뜨고 경련을 일으키며 사지를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그 모습이 너무나 흉측해서 충격을 받는다. 그래서 맥이 빠져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이번에는 인조인간이 침대 커튼을 들추고 노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장면은 헨리 퓨슬리가 그린 당대의 인기작 ‘악몽’(그림 ②)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미술사가들은 추측한다.









그림 ①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연(1632), 렘브란트 판 레인 (1606~69) 작, 캔버스에 유채, 170x216cm,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 네덜란드 헤이그






 퓨슬리의 그림에서 서양판 가위 귀신 인큐버스(Incubus)가 여인을 짓누르고 이상한 눈빛의 말이 커튼 사이로 머리를 들이미는 것은 인간의 잠재된 관능적 욕망이 이성(理性)이 잠든 사이에 깨어나 인간을 압박하는 것을 암시한다. 반면에 『프랑켄슈타인』에서 인조인간이 침대 커튼을 들추고 빅터를 바라보는 장면은 과학기술의 부작용에 대한 간과가 빚어낸 괴물이 인간을 위협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시각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빅터는 공포에 질려 그대로 달아나 버린다. 그 후 인조인간은 홀로 헤매며 인간의 말과 글을 흉내 내며 익혔고, 곧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자문하게 됐다. 마침내 빅터의 연구 일지를 읽게 되고 “저주받을 창조자여, 왜 당신은 스스로도 역겨워 고개를 돌릴 만큼 끔찍한 괴물을 만들었는가?”라고 절규한다. 그래도 인간과 유대하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주는 등 선행을 하지만, 답례로 돌아온 것은 공포의 비명과 적대적 폭력뿐이었다. 결국 인조인간은 전인류, 특히 자신의 창조자에 대해 복수를 다짐하고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한다.



 그러다 인조인간은 빅터를 만나게 되고 자신과 비슷한 인조인간 여자친구를 만들어주면 멀리 떠나겠다고 타협안을 제시한다. 하지만 빅터는 괴물을 또 하나 창조하는 것이 두려워 거부하고, 인조인간은 “그럼 너도 나처럼 철저한 고독을 겪어보라”고 외치며 빅터의 신부(新婦)를 목 졸라 살해한다. 1931년작 고전영화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살해된 신부의 모습 역시 퓨슬리의 ‘악몽’에서 따왔다(그림 ③ 포스터 하단 참고). 광분한 빅터는 인조인간을 쫓다가 북극에 이르러 피로와 추위로 숨을 거둔다. 인조인간이 그 자리에 나타나 슬픈 한숨을 쉬며 “이제 내 일은 거의 끝났다”고 말하고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불태우겠다고 말한 후 사라진다.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적으로 엄밀한 작품은 아니지만, 과학기술이 야기할 수 있는 사회적·인권적 문제를 최초로 진지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SF의 중요한 시조라고 할 만하다. 빅터는 자신의 피조물이 훗날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기존 사회와 충돌할 것을 생각해보지 않은 채 함부로 창조했고, 나중에는 이미 독립된 인격체가 된 피조물을 창조자라는 이유로 함부로 파괴하려고 했다. 그런 빅터에게 인조인간은 “당신은 어찌 그렇게 생명을 갖고 논단 말인가?”라고 외친다. 머지않아 체세포 복제 연구와 인공지능 개발로 저 인조인간의 후예를 볼지도 모르는 우리는 그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SF 선구자 메리 셸리 … 19세기 아나키스트의 딸











여성은 SF와 친하지 않다는 통념이 있다. 그러나 SF의 시조로 손꼽히는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그림)는 긴 드레스를 걸친 19세기 여성이었다. 그녀의 부모가 무정부주의자 윌리엄 고드윈과 여성운동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도 아니다. 남편은 낭만파 시인 퍼시 셸리였다. 부모의 영향을 받아 메리 셸리는 인조인간에게 사회적 마이너리티의 분노를 투영했다. “부(富)나 좋은 혈통이 없으면 선택받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낭비하게 되지. 게다가 나는 외모조차 흉측하지 않은가?”라고 인조인간은 외친다. 작가 자신도 마이너리티로서 고통을 겪었다. 『프랑켄슈타인』의 작가가 여성임이 밝혀지자 악의적인 평이 많았던 것이다.



문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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