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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아의 여론女論] ‘시누이·동서’의 명절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명절날 나는 엄매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1930년대 시인 백석(白石, 1912~1995)이 ‘조광’(1935년 12월호)에 발표한 시 ‘여우난곬족(여우가 나온 골짜기 부근에 사는 일가친척들)’의 한 대목이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조선일보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30년까지 자신의 고향에서 살았다. 유학 후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게 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쓴 이 시에는 고향 평북에서 살던 시절 평화롭고 흥겨우며 맛 좋은 음식들로 가득했던 명절의 풍경이 섬세하게 추억되고 있다.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큰집에 가 수많은 친척 아이들과 신나게 놀고, 평소에는 쉽게 못 먹는 온갖 음식을 배불리 먹는 명절. 이날이 소년 백석에게 얼마나 설레고 기다려지는 ‘이벤트’였겠는가. 백석뿐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행복한 기억이 만들어지기 위해 꼭 존재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백석의 시에서도 명절 풍경의 일부로 무척이나 ‘당연한 듯’ 그려진, “문창(門窓)에 텅납새(처마의 안쪽 지붕)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서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이 그것이다. 밤늦도록 놀다가 동틀 무렵에야 잠든 식구들을 위해 “샛문틈,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를 만들어내는 여성들의 고된 노동이 없었다면 풍성한 설날이나 추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명절은 즐거운 가족 행사이기도 하지만 ‘전통’이라는 이름하에 성(性) 역할의 구분이 가장 공고해지는 날이기도 하다. 남성들이 차례상에 절을 올리고 거실에 모여 앉아 술과 음식을 먹으며 웃고 떠들기 위해서는 많은 여성이 부엌에서 쭈그리고 앉아 나물을 다듬고 전을 부쳐야 한다. 우리 사회에 양성평등이 예전보다는 많이 실현되었다지만 이런 ‘전통’ 앞에서는 여전히 남녀 간 성차별이 존속하고 있다.



 한국의 2대 명절 중 하나, 추석 연휴가 마무리됐다. 이 기간 동안 우리 방문 틈으로 ‘맛있는 내음새’를 들어오게 해준 이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의 노동을 함께 나눌 생각은커녕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조차 건네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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