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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02) 북한 공작원의 협박





“못사는 것들이 어디 비싼 데서 촬영해? 간나XX … ”



1967년 영화 ‘어느 여배우의 고백’에서 남정임의 연기를 지도하고 있는 김수용 감독(오른쪽). 신성일과 김 감독은 68년 ‘일본인’을 도쿄에서 찍을 때 북한 공작원들의 협박을 받기도 했다. [중앙포토]





영화배우 신성일의 전성기였던 1967~68년은 남북갈등이 고조된 시기였다. 나는 일본에서 북한 사람을 처음 만나고 남북분단을 실감했다.



 68년 영화 ‘일본인’ 촬영차 도쿄 아카사카(赤坂) 뉴재팬호텔에 머물렀다. 돈 많은 재일동포 니시야마가 제작자였기 때문에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호텔 건너에는 조총련이 운영하는 백두산이라는 대형식당이 있었다. 60년대에는 북한이 우리보다 잘 살았다. 70년대 들어 남북의 경제력이 비슷해졌다. 당시에는 해외에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북한인과 만나는 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67년 7월 발생한 동베를린 사건은 남북관계를 경색시켰다. 중앙정보부는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간첩 활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중앙정보부가 지목한 간첩단 중에는 독일 체류 중인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 시인 천상병 등이 포함됐다.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는 독일 정부가 우리 정부에 보석금을 내 복역 2년 만에 독일로 돌아갔고, 그 직후 귀화했다.



 뉴재팬호텔에 숙소를 정한 우리는 백두산 앞을 지나갔다. 그러자 검은 양복을 입은 북한 공작원들이 우리 일행에게 시비를 걸었다. 겁을 주려는 것 같았다. “우리보다 못 사는 것들이 어디, 비싼 데 와서 촬영해. 간나 새끼야!”



 그들이 큰소리 칠 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들은 넉넉한 공작비를 갖고 활동했다. 해외에 금괴를 지니고 나가 공작비로 사용하기도 했다. 나로선 겁 먹을 입장은 아니었지만 무척 기분이 나빴다.



 북한은 교수들까지 거칠었다. 73년 프랑스 파리 사이오궁에서 남북사학자대회 리셉션이 열렸고, 나는 파리에 체류 중인 내 여동생과 함께 참석했다. 내가 한 프랑스 교수와 자연스럽게 이야기했기에 대사관 측은 내가 프랑스어를 잘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사실 그 교수가 한국학을 연구해 한국어를 유창하게 했다. 그때도 북한 교수들의 경직된 태도로 현장 분위기가 무거웠다.



 일본에서 북한 공작원들 때문에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돈이 풍족했다. 니시야마는 내게 용돈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물었다. 돈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였다. 딸 경아가 세 살, 아들 석현이가 한 살이어서 애들 장난감 사주려고 별 생각 없이 150만 엔을 달라고 했다. 일본에서도 만 엔짜리는 67년 처음 등장한 고액권이었다. 웬만한 일본인은 만 엔 지폐를 구경하지 못할 때였다. 나는 니시야마에게 받은 만 엔 다발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김수용 감독을 데리고 긴자(銀座) 스시집에 갔다. 스시 한 조각에 500엔이었다. 만 엔짜리 다발을 카운터에 올려놓고 계산하니 일본인들 눈이 휘둥그래졌다. 조금 괜찮게 생긴데다 롤렉스 백금 시계까지 차고 있었으니…. 귀국할 땐 재일동포 아주머니에게 120만엔을 주며 아이들 선물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세 발 자전거를 비롯해 큰 트렁크로 6개가 아이들 선물이었다. 그 아주머니는 내게 10만엔을 돌려주었다.



 김포공항에선 세관원들이 트렁크 6개를 살피느라고 난리가 났다. 세관원들은 결국 “팔 물건 아니고, 애들 물건이네. 구경 잘 했수”라며 통과시켜줬다. 북한의 경제적 우위는 그로부터 얼마 가지 못했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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