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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⑩ 쿤밍(昆明)





해발 1900m, 사시사철 ‘봄의 도시’ … 제갈량의 칠종칠금 무대





‘중국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시 당서기’ ‘공무원 킬러’. 중국 쿤밍(昆明)시의 1인자 추허(仇和·구화·54) 당서기에게 붙는 수식어다. 온갖 파격인사와 급진정책을 펼쳐왔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구름의 남쪽, 대륙의 변경에 위치한 윈난(雲南)성의 중심 쿤밍시는 추허의 기치 아래 천지개벽 중이다. 쿤밍의 진면목을 찾아 떠나보자.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쿤밍은 민족의 용광로다. 한(漢)족을 비롯해 이(彝), 후이(回), 바이(白), 먀오(苗), 하니(哈尼)족 등 26개 민족이 모여 산다. 사진은 지난 4월 쿤밍에서 열린 국제문화여행축제의 소수민족 공연. [중앙포토]






햇살과 채운(彩雲)의 도시 … 몽골 때 제국에 편입











쿤밍은 태양의 도시다. 연평균 일조량이 2327.5시간에 달한다. 서울보다 약 300시간이 더 많은 수준이다. 중국인들은 햇볕을 쬘 때 ‘샤이(曬, 쬘 쇄)’라고 말한다. 쿤밍 사람들은 다르다. 고기를 굽다는 의미의 동사 카오(烤, 고)를 써 ‘카오타이양(烤太陽)’이라고 한다. 마치 화롯불을 쬐듯 태양을 쬔다.



쿤밍은 고원의 도시이기도 하다. 해발고도가 1900m다. 해발고도는 역으로 기온을 낮춰준다. 쿤밍은 1년 중 가장 추운 1월 평균기온이 9.3도, 가장 더운 7월에는 22.2도에 불과하다. 연평균 기온은 15.6도다. 여름이 없는 셈이다. 그러기에 쿤밍은 사시사철 봄의 도시 ‘춘성(春城)’으로 불린다.



쿤밍의 구름은 많은 얘깃거리를 전해준다.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 장왕(莊王)의 자손 장교(莊蹻)는 왕의 명령을 받들어 지금의 쓰촨(四川)과 구이저우(貴州) 공략에 나섰다. 장교는 돌연 전쟁에 염증을 느꼈다. 마침 자신의 말을 끄는 몸종의 할아버지가 그를 찾아와 오색 구름 속 이상향을 알려줬다. 솔깃한 장교는 부대를 이끌고 남으로 향했다. 어느 날 고산준령을 넘던 중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구름을 보았다. 붉은빛 속에 녹색이, 녹색 속에 보랏빛이, 황색이, 다시 붉은색이, 흰색이 피어나는 채운(彩雲)이었다. 구름 아래로 홀연 푸른 산과 물로 둘러싸인 금색의 성문이 나타났다. 화원(花園)과 같은 성 안에 사는 순진무구한 주민들이 이들을 반겼다. 장교는 이곳에 안주해 스스로 전국(滇國)의 왕이 됐으니, 그곳이 바로 지금의 쿤밍이다. 『사기(史記)』 서남이전(西南夷傳)에 나오는 장교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쿤밍에 전해 오는 구름의 전설이다.



한무제(漢武帝) 시기 장건(張騫)은 실크로드를 개척했다. 그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지방에 도착해 보니 이들은 이미 남방 실크로드를 통해 ‘서남이(西南夷·지금의 윈난성 지역)’와 물자를 교역하고 있었다. 차마고도(茶馬古道)다. 장건의 보고를 들은 한무제는 욕심이 발동했다. 오색 구름이 머무르는 ‘채운남현(彩雲南現)’의 꿈을 꿀 지경이었다. 기원전 109년 한무제의 군대는 쿤밍을 점령해 전지(滇池)현을 설치했다. 구름을 품은 것이다. 훗날 제갈량(諸葛亮)이 맹획(孟獲)을 잡은 칠종칠금(七縱七擒)의 무대가 바로 쿤밍 일대다. 당(唐)대에는 남조(南詔), 송(宋)대에는 대리국(大理國)이 이곳을 다스렸다. 몽골제국의 쿠빌라이가 송을 치기 위해 대륙을 우회해 대리국을 정복한 뒤 운남행성을 설치했다. 쿤밍은 비로소 제국에 편입됐다.



대륙의 남서문 … 홍콩·인도와 연결되는 교통의 허브



쿤밍은 외지다. 대륙의 서남부 고원지대 속에 숨어 있다. 굳게 닫힌 폐쇄적인 도시처럼 보인다. 실상은 다르다. 쿤밍은 대륙의 남서문(南西門)이다. 차마고도는 그 시작이었다.



쿤밍은 중원과 세 개의 길로 통했다. 하나는 천전대도(川滇大道)다. 쿤밍에서 이빈(宜賓)을 거쳐 쓰촨 청두(成都)에 이르는 도보로 22일이 걸리던 교통로다. 다음은 전검대도(滇黔大道)다. 쿤밍에서 구이저우성 구이양(貴陽)으로 통하는 20일 여정의 행로다. 또 다른 길은 전계대도(滇桂大道)로 광시(廣西)성 구이린까지 24일이 걸리는 루트다. 1882년 베트남을 점령한 프랑스는 구리 등 쿤밍 일대의 자원에 눈독을 들였다. 프랑스는 1910년 하노이(河內)로부터 쿤밍을 연결하는 국제철도를 뚫었다. 전월(滇越)선, 중국 최초의 국제 철로다. 당시 청(淸)나라 마지막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한 윈난 출신 원가곡(袁嘉谷)이란 관리가 있었다. 그가 1910년 10월 고향으로 돌아갈 때, 베이징에서 기차를 타고 상하이로 내려와 배를 이용해 홍콩을 거쳐 하노이에 도착했다. 이어 전월철도를 타고 쿤밍에 도착했다. 보름이 채 안 걸리는 여정이었다. 수 년 전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베이징으로 갈 때 두 달이 걸리던 여정이 1/4로 줄어든 것이다.



항일전쟁이 본격화되고 국민당정부가 충칭으로 퇴각하면서 윈난성 쿤밍은 대외창구로 변했다. 쿤밍의 비행장은 버마(지금의 미얀마), 홍콩, 인도와 충칭을 연결하는 허브공항이 됐다. 당시 중국에서 가장 물동량이 많은 공항이었다.



중국 최고 명문대였던 서남연합대학









베이징, 칭화, 난카이 등 3개 명문대학이 합쳐 성립된 ‘국립서남연합대학’의 정문(위)과 승전 기념으로 세운 ‘국립서남연합대학 기념비’.



대일본 항전 시기 쿤밍은 중국의 대후방에서 돌연 최전선이 됐다. 파죽지세의 일본군은 베트남 하노이와 버마를 점령한 뒤 쿤밍을 옥죄었다. 풍전등화 신세, 60여만 명의 군대가 쿤밍에서 항전을 이어갔다. 암울했던 전쟁기간 동안 쿤밍은 역설적으로 중국인들의 정신적 수도가 됐다. 쿤밍은 시인의 도시, 과학의 도시, 문화의 도시로 탈바꿈했다.



국립서남연합대학(약칭 서남연대·西南聯大) 때문이다. 서남연대는 1938년 5월부터 1946년 5월까지 존재했던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문 대학이다. 베이징대, 칭화(淸華)대, 난카이(南開)대 등 3대 명문 대학이 쿤밍의 서남연대로 뭉쳤다. 학생들은 대부분 청말의 관리 원가곡처럼 쿤밍~하노이 국제열차를 타고 들어왔다. 교훈은 ‘강의견탁(剛毅堅卓)’. 강직하고, 의지력이 굳세며, 입장·신념·태도가 결연하고, 재능과 지식이 탁월하다는 뜻이다. 이 교훈은 서남연대의 캠퍼스를 이어받은 윈난사범대학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캠퍼스 동북쪽에는 승전 후 쿤밍을 떠나면서 세운 ‘국립서남연합대학기념비’가 남아 있다. 철학가 펑요우란(馮友蘭·풍우란)이 글을 쓰고 시인 원이둬(聞一多·문일다)가 비문을 새겼다. 펑요우란은 “역사상 진(晉), 송(宋), 명(明)이 중원을 지키지 못하고 창장(長江)을 남으로 건넜다”며 “우리(서남연대의 교수와 학생)들이 역사상 네 번째로 남도(南渡)한 지 십 년도 지나지 않아 국토를 회복했으니 가위 기념할 만 하다”라고 승리의 감격을 적었다.



서남연대는 8년간 8000여 명의 재학생과 252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교수는 모두 당대의 최고 석학이요, 학생들은 미래 중국의 동량들이었다. 원자폭탄, 수소폭탄, 인공위성을 일컫는 양탄일성(兩彈一星)의 개발자 중 8명, 중국과학원과 공정원 원사 171명, 5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양전닝(楊振寧·양진녕)과 리정다오(李政道·이정도)가 모두 서남연대 출신이었다.



이안 감독이 영화 ‘색계(色戒)’의 출연배우들에게 필독시켜 유명해진 루차오(鹿橋)의 소설 『미앙가(未央歌)』의 무대도 서남연대다. 소설은 쿤밍을 배경으로 전란 속에서 꽃핀 젊은 청춘들의 꿈과 사랑과 우정을 그렸다.



서남연대가 떠난 쿤밍은 암울했다. 서남연대는 안으로는 학문의 자유를 지키고, 밖으로는 민주를 지키는 보루였다. 서남연대 문학부(단과대학) 학장이던 원이둬는 시인 겸 투사였다. 중간파 지식인들의 정치결사인 중국민주동맹 윈난성 책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국공 대립이 격화되자 중간파는 설 자리를 잃었다. 독재에 반대하며 반(反)장제스(蔣介石·장개석) 운동에 앞장섰던 원이둬는 46년 7월 국민당 쿤밍경비사령부 소속 군인의 총탄에 쓰러졌다. 시인의 도시 쿤밍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쿤밍에서 꼭 가봐야 할 10곳



지금도 쿤밍의 진면목을 느끼려면 70년 전 서남연대의 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차를 타고 들어가는 게 좋다. 쿤밍에서 꼭 가봐야 할 10곳을 소개한다.













1 금마(金馬)와 벽계(碧雞) 쿤밍의 상징이자 쿤밍 시민들의 정신적 토템이다. 문이 없는 대문 모양의 중국 특유의 석조물인 패방(牌坊)이다. 금마벽계방은 쿤밍의 최고 번화가에 위치한다. 명(明)대에 처음 세워진 이래 수 차례 훼손과 중건을 거듭했다. 문화대혁명 때 무너진 것을 1999년에 복원했다.



2 톈츠(滇池)호: 중국에서 여섯 번째로 큰 담수호. 쿤밍의 정신적 고향이다. 면적이 297.9㎢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다. 고원명주(高原明珠)가 별명.



3 서산(西山)용문(龍門): 톈츠호와 인접한 서산의 중턱에 있는 문. 위로는 하늘과 접하고, 아래는 절벽이다. 오백 리 톈츠호를 한눈에 조감할 수 있다. 우화등선(羽化登仙)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4 취호(翠湖): 호수 위의 섬과 정자를 잇는 다리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겨울철이 되면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수천 마리 붉은부리갈매기 떼가 장관을 이룬다.











5 금전(金殿): 윈난의 구리 250t으로 만든 도교사원이다. 오삼계(吳三桂)가 청에 반역을 꿈꾼 장소이자,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崇禎)제에게 하사받은 절세미인 진원원(陳圓圓)과 사랑을 나누던 곳이다.



6 공죽사(筇竹寺): 불교 선종의 사찰. 당송 시대에 세워졌다. 청말 쓰촨의 저명한 조각가 려광수(黎廣修)와 다섯 제자들이 1883년부터 90년까지 7년간 오백 개의 나한상(羅漢像)을 이곳에 세웠다.











7 대관루(大觀樓): 중국에는 건물 기둥에 대구(對句)로 된 대련(對聯)을 쓰는 전통이 있다. 청나라 시인 손염(孫髯)이 지은 ‘천하제일장련(天下第一長聯)’으로 불리는 180자 대련이 유명하다.



8 원통사(圓通寺): 당나라 때에 세워진 쿤밍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절이다. 유·불·선 삼교의 요소가 한데 합쳐진 사원이다.



9 흑룡담(黑龍潭): 『한서(漢書)』 지리지에 보이는 흑수사(黑水祠)를 청나라 총독 완원(阮元)이 고증해 도교사원을 지었다. 당나라 홍매(紅梅)와 송나라 측백나무가 유명하다.



10 윈난육군강무당(雲南陸軍講武堂) 중국에서 유일하게 지금까지 보존된 근대식 사관학교 건물. 1909년 설립됐다. 황포군관학교의 모태다. 1920년대 초 한국인 30여 명도 이곳에서 수학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원수 주더(朱德·주덕)가 1기 입학시험에 떨어진 뒤 재수 끝에 합격한 곳이다.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4인방 체포의 주역 예젠잉(葉劍英·엽검영) 원수도 이곳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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