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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의 시시각각] 휴가지에서 만난 한문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지난주 휴가를 맞아 다산연구소(이사장 박석무·단국대 석좌교수)와 실학박물관이 주최한 2박3일짜리 ‘실학기행’에 참가했다. 아침 일찍 동서울터미널에 모여 남양주시 실학박물관·수원 화성·안산 성호(이익)기념관·부안 반계(유형원)유적지를 돌고, 둘째날엔 흑산도, 마지막 날 강진 다산초당·백련사와 해남 녹우당(윤씨 고택)을 순례하는 비교적 강행군에 속하는 코스였다. 다산 정약용 전문가인 박석무 이사장의 웅숭깊고 해박한 설명이 뒤따랐기에 눈에서 비늘을 벗겨내는 듯한 실속 있는 여행길이 될 수 있었다.



 옛 자취를 짚을 때마다 항상 나타나 골치 아프게 만드는 게 한자와 한문이다. 현판·비문·묘비명 등등 한자 아닌 게 없다. 대학을 나왔다지만 한자 몇 글자나 읽을 뿐이지 문장(한문)에 이르면 말문이 턱 막히는 게 필자만의 처지는 아닐 것이다. 이번 여행도 그랬다. 경기도 안산에 있는 성호 이익(1681~1763)의 묘소에 절을 하고 나니 묘갈명(墓碣銘)을 한 줄이라도 해독할 수가 있나. 채제공이 지은 묘갈명을 박석무 이사장이 줄줄이 외우며 해석해주었다. “도를 안고도 혜택을 미치지 못했으니 한 세대의 불행이로다. 책을 저술해 아름다운 혜택이 넉넉했으니 백세의 다행이로다. 하늘의 뜻은 아마도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한 세대야 짧지만 백세는 길도다.” 절묘한 대조법으로 고인을 추모한 명문장을 까막눈끼리 갔더라면 하나도 맛보지 못할 뻔했다.



 그래서 되도록 일찍 한자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표준국어대사전 표제어의 69.1%가 한자어(58.5%) 또는 한자어가 섞인 단어(10.6%)다. 탁월한 조어력(造語力)을 지닌 한자를 모르고선 우리말 실력도 늘지 않는다. 그렇다고 국민 모두가 교양 수준을 넘어 프로가 될 수는 없다. 어느 지점부터는 이 방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게 된다. 전국 곳곳의 유물·유적지도 전문가들의 해설·번역을 빌려야 비로소 생명을 부여받는 셈이다.



 그러나 실상은 다른 모양이다. 일부 ‘전문가’로 불리는 사람들의 무성의와 실력 부족, 공무원들의 적당주의가 맞물린 결과다. 한문고전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낮은 인식도 한몫했다. 명승지·관광지에 세워진 한문 시비(詩碑)에는 특히 잘못된 번역이 많다고 한다. 틈날 때마다 돌아다니며 시비의 오역을 잡아내 ‘오역 암행어사’로 불리는 정선용(54)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은 “아예 세우지 않느니만도 못한 엉터리가 10% 정도이고 부분적으로 틀리게 번역한 시비도 30%쯤 된다”고 말했다. 강원도 경포대, 경기도 용문산, 충청도 탄금대, 경상도 문경새재, 전라도 지리산 일대 등 시비가 세워진 곳마다 예외 없이 오역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지난 휴가철에 찾아가 날림으로 번역된 시비들을 감상했을 수많은 국민이 본 무형의 피해는 누가 보상할 것인가.



 예를 들면 경포대 옆 한시(漢詩)공원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이정암(1541~1600)의 시비는 번역자의 실력 부족으로 통째로 틀렸고, 충주 탄금정에 걸린 네 개의 시판(時板)은 원문도 잘못됐을 뿐더러 번역은 더더욱 엉망이어서 바로 떼어내는 게 나을 정도였다고 한다. 문경새재 꼭대기 3관문 부근의 김종직(1431~1492) 시비 역시 번역자의 한문 소양 부족으로 생뚱맞은 해석을 턱하니 새겨놓았단다.



 번역은 에누리 없이 그 나라의 지금 수준이다. 정선용 위원은 “오역을 지적당하고도 고치겠다고 나선 지자체는 아직 없었다”고 말했다. 아이들 교육을 생각해서라도 시급히 바로잡아야 한다. 실력이 모자란다면 한국고전번역원에서 3년 전부터 시행 중인 ‘한문고전자문서비스’라도 이용하시라. 한시뿐 아니라 집안에 내려오는 족보·서화·간찰 등도 의뢰하면 저렴한 비용으로 번역해준다. 내년 휴가철엔 초등생이 현장학습 하겠다며 오역투성이 비문을 열심히 베끼는 애처로운 풍경이 사라지기 바란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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