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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전 17세 때 우즈 기록 도전…잊혀진 천재 김성윤 “저 다시 시작합니다”







프로 데뷔 11년 만에 KGT 조니워커 오픈에서 우승같은 준우승을 차지한 골프 천재 김성윤이 대회 2라운드 경기 도중 아이언 샷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스튜디오 PGA 민수용]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페블비치 골프장에서 36홀 매치플레이로 치러진 결승전에서 데이비드 고셋(20·텍사스대)에게 28번째 홀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8홀을 남겨놓고 9홀을 져 승부가 갈렸다. 당시 17세였던 김성윤은 타이거 우즈가 94년 수립한 이 대회 최연소 우승 기록(18세7개월)을 갈아치우는 데는 실패했으나 꿈의 무대인 메이저대회 2000년 마스터스 자동 출전권을 획득하는 영예를 안았다.











천재 골퍼 김성윤(29·동산밸브)의 등장은 이렇게 화려했다. 그는 이미 국내 주니어골프 무대에서도 이름을 떨친 선수였다. 프로골퍼인 아버지 김진영(64)씨의 영향으로 3세 때 처음 골프채를 잡았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본격적인 골프 수업을 시작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줄곧 동급생 중 랭킹 1, 2위를 다퉜다. 특히 청주 서원중 3학년 때인 97년 아시아주니어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98년 매경오픈에서 아마추어 1위, 99년 한국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세계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는 ‘한국 남자골프의 희망’으로 주목받았다. 1m77㎝, 90㎏(현재는 1m80㎝, 88㎏)의 건장한 체구에서 뿜어 나오는 평균 300야드 드라이브샷은 김성윤의 주특기였다. 롱게임의 드라이브샷은 물론이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쇼트게임과 퍼팅도 수준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김성윤은 2000년 마스터스 출전 이후 1년에 10㎝씩 사라져버렸다. 마스터스가 끝난 그해 4월 프로 전향을 선언하고 본격적으로 프로 선수로서 투어 무대에 발을 내디뎠으나 그 벽은 너무 높았다. 2001~2003년까지 3년 동안 그가 국내 투어에 뛴 대회 수는 12개뿐이고 성적은 바닥을 쳤다. 상금 랭킹은 2001년 117위(2개 대회 출전), 2002년 72위(5개 대회 출전), 2003년 91위(5개 대회 출전)였다. 김성윤은 이후 투명인간처럼 자취를 감췄다. 극소수 골프 관계자들 사이에서 아주 간혹 “예전에 김성윤이 있었지. 요즘 그애 어디서 뭘 하나” 정도의 관심을 받았을 뿐 골프 팬들의 기억 속에서는 잊혀져 버렸다.



그렇게 11년의 시간이 훌쩍 흐른 지난 7일 제주 오라골프장에서 열린 한국프로골프투어(KGT) 조니워커 오픈 최종일. 김성윤이 11언더파 단독 2위의 성적으로 부활했다. 과거의 김성윤을 돌이켜보면 아주 작은 성과물이다. 하지만 그에겐 우승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지닌 2위였고 가슴이 북받치는 사건이었으며 그날 태풍이 몰고 온 폭우는 지난 수년 동안 펑펑 쏟아냈던 자신의 눈물 같았다.



“몇 년을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는지 몰라요. 골프를 다시 시작하는 데는 정말 많은 용기가 필요했어요. 하루 하루가 ‘포기’와 ‘다시 시작’이란 내적 갈등의 연속이었죠. 포기를 생각했다가도 ‘골프’를 생각하면 너무 약이 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김성윤은 지금 일본에 있다. 그는 올 시즌 KGT와 일본프로골프투어(JGTO)에서 뛸 수 있는 두 장의 투어카드를 가지고 있다. 23일 김성윤과 전화로 인터뷰했다. 목소리는 바리톤에 가깝게 묵직했고 차분했다. 2000년 마스터스 출전 이후 그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99년 김성윤의 이름만큼이나 반갑다. 지난 시간을 더듬는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잊혀진 지난 11년의 인간 김성윤이 궁금하다.



“기억해 주시는군요. 참 긴 시간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너무 준비 없이 PGA 투어에 뛰어들었고 조급했어요. 2001년 겨울 왼팔꿈치 부상을 입었고 그 과정에서 재활 시간이 길어졌어요. 연습을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됐고 치료 방법을 찾지 못하면서 깊은 수렁에 빠져버린 거죠.”



-왼팔꿈치 부상이 그렇게 심각했나요.



“진단 결과 팔꿈치 연골이 파열된 상태였죠. 무리하게 스윙 연습을 하면 심하게 부어오르고 통증이 컸어요. 야구선수들이 고생하는 병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당시 국가대표 시절의 주치의께 도움을 받았고 숱한 방법으로 재활 노력을 했어요. 그렇지만 다시 훈련을 시작하면 또 마찬가지였어요. 수술을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선수 생명이 10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죠. 골프는 정말 길게 갈 수 있는 운동이잖아요. 그래서 재활이 당시로서는 최선이었죠.”



그의 얘기를 집약하면 지난 11년의 시간은 이렇게 흘러갔다. 1999년 US아마추어골프챔피언십 준우승→2000년 마스터스 출전→프로 전향과 함께 미국 PGA 2부 투어인 바이닷컴 투어 대기자 신분으로 활동→2001년 국내 KGT 프로테스트 1위 통과→왼팔꿈치 부상→재활 치료→2001~2003년 KGT 일부 대회 초청 선수로 출전 및 재활 치료→2004년~2006년 3월까지 군 복무 및 골프 포기(군 제대를 앞두고 골프 재도전 5년 목표 설정)→2006년 5월부터 KGT의 2부 투어 출전→2007~2008년 KGT 정규 투어 카드 획득→2009년 KGT 정규 투어 카드는 잃고 일본 JGTO 정규 투어 카드 획득→KGT 및 JGTO 정규 투어 카드 획득 모두 실패→2010년 다시 KGT 및 JGTO 2부 투어 전전→2011년 KGT 및 JGTO 정규 투어 카드 동시 획득.



“조급함이 제 골프를 망쳤죠. US아마추어골프챔피언십에서 준우승을 하자, 바로 세계 굴지의 스포츠 매니지먼트사가 따라붙었죠. 2000년 4월 프로 전향을 선언하고 그 길로 미국에 머물며 PGA 2부 투어(바이닷컴)에 뛰어들었어요. 시드는 없었지만 초청해주는 곳이 제법 많았죠. 그런데 성적이 나지 않더군요. 이 무렵 스윙에 손을 댔어요. 타이거 우즈의 스윙 코치를 맡고 있는 부치 하먼 골프스쿨을 찾아갔어요. 1년 가까이 우즈와 동문수학을 한 셈이죠.”



그러나 당시 김성윤의 마스터플랜은 헛돌고 있었다. 그 좋던 스윙은 부치의 스윙 이론과 섞이면서 더욱 곤두박질쳤고 인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하자 초청해주는 대회도 없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고 여기에 아버지가 골프 관련 사업에 투자했다가 실패하면서 경제적으로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집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알게 되면서 어린 나이에 빨리 투어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같다”고 말했다. 2001년 하반기께 국내로 복귀한 그는 프로 테스트를 1위로 통과했지만 그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팔꿈치 연골 파열이란 부상은 김성윤의 존재 가치를 송두리째 빼앗아가 버렸다. 자포자기. “당시에는 경기에 나가는 것이 연습의 전부였어요. 2002년 KTF와 3년간 계약을 맺게 됐는데 투어에 거의 나가지 못했죠. 그래서 군 입대를 앞두고 KTF측에 계약 철회를 요구했는데 나머지 1년은 다시 복귀하게 되면 후원해주시겠다고 하더군요. 너무 감사한 일이었어요.”



-김 프로, 마스터스 출전은 독이었을까요. 약이었을까요.



“휴~. 지금 생각하면 마스터스 출전은 독이었어요. 그런데 군대에서 골프 재도전 5년 목표를 세우게 된 것 또한 마스터스 때문이죠. 골퍼로서 그 꿈같은 무대를 잊을 수 없었어요. ‘나, 김성윤은 아직 골프에 패하지 않았다. 나 김성윤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오기가 생겼어요.” 그는 지금 제2, 제3의 골프 인생의 출발점에 다시 서 있다. 그는 “이제 웅크리지 않겠다. 그렇다고 어떤 목표를 위해 내 자신을 채근하고 자박하지도 않을 생각이다. 프로 데뷔 후 단 한 번의 우승도 못해봤지만 현재의 내 모습을 보고 행복해 하는 아내와 돌이 갓 지난 딸(여진)이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최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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