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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덕수궁 석조전









1968년 한운사의 소설 『대야망』엔 이런 대목이 있다. 한때 외교관을 지낸 한 인사를 모델로 했다는 주인공은 덕수궁의 이곳저곳을 담은 사진을 외국 실력자들에게 뿌리며 자기 집이라고 자랑한다. ‘내 집이 이 정도니 한국에서 내 위치를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도였는데, 곧잘 통했다. 석조전·정관헌 등 고풍스러운 양식 건물이 자아낸 분위기 때문일 터다. 실제로 당시 해외 펜팔 하던 어느 언론인이 석조전 앞에서 사진을 찍어 제 집인 양 소개했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석조전은 조선 궁궐 내 지어진 첫 서양식 전각이다. 1897년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의 원래 이름)을 황궁으로 정하고 황제에 오른 뒤 궁역을 넓히며 전각을 신축했다. 석조전은 정전(正殿)인 중화전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워졌는데 실내공사까지 완료된 것은 한일합병 해인 1910년이었다. 덕수궁 전체가 제국의 영욕을 함께한 곳이지만 석조전은 특히 애달픈 데가 있다. 유학을 명목으로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이은(훗날의 영친왕) 왕세자 부부가 22년 일시 귀국했을 때 생후 8개월 된 아들 진이 이곳에서 급사했다. 고종 독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인(이방자 여사)의 피가 섞인 아들을 독살한 것이라는 설이 돌았다.



 조선 궁궐 양식을 따르지 않은 석조전은 일제에 의한 식민 근대와 맞물려 곱지 않은 눈길을 샀다. 건축재료인 석조를 기반으로 한 성의 없는 작명이라느니, 전통 조경에 없는 분수대 정원이라느니 하는 비판이다. 총독부 치하에서 일본 미술품 진열 전시장으로 쓰이다가 해방 후 미·소 공동위원회 건물로 쓰이는 등 외세에 시달린 쓰임새도 부정적 인식을 강화했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석조전 건립이 고종의 근대 국가 구상이 투영된 것이었다는 데 비중을 둔다. 전통에 없던 돌집을 짓고 그 정체성을 이름으로 한 것 자체가 서구 문물을 적극 수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것이다(『덕수궁』 안창모 지음, 2009).



 석조전의 최초 설계도(1898년)가 한국 건축공학자에 의해 발굴됐다는 소식이다. 일제에 의한 훼손 운운하지만 ‘석조전 미술관과 박물관 사이 2층 복도에 민간인이 경영하는 실내 축구장이 설치’(본지 1968년 6월 4일자)됐을 정도로 우리의 문화재 인식도 별 볼 일 없었다. 제대로 된 원형 복원을 통해 석조전과 덕수궁에 서린 근대 제국의 꿈과 아픔의 역사를 곱씹게 됐으면 한다.



강혜란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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