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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스페셜] 석조전 황제의 발코니 누가 떼냈나




J R 하딩이 1898년 완성한 덕수궁 석조전 입면 설계도 ‘Imperial Palace, Seoul’의 남측 정면 부분(맨 위 그림). 원래 청사진으로 되어 있던 것을 알아보기 쉽게 포토샵으로 반전(反轉)한 이미지다. 석조전의 뒷면, 측면의 구조는 물론 창호의 모양과 크기 등이 상세히 적힌 설계도도 함께 나왔다. 하딩은 1898년 2월 대만의 체후에서 이 설계도를 완성했다고 적었다. 아래 그림은 석조전 초기 평면도(사진 ①). 상층(上層·맨 위층)의 뒷면(북쪽)에 발코니(빨간색 동그라미)가 표시돼 있다. 현재의 석조전에선 발코니가 사라지고 없다. 발코니로 연결된 문도 창호로 변형됐다(사진 ②). 복원 공사 중인 석조전(사진 ③)의 모습을 보면 발코니가 설치됐던 흔적(하얀색 동그라미)이 건물 외벽에 남아 있다.


건축공학자 김은주(44)씨가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왕이 거처하는 건물)으로 건립된 덕수궁 석조전의 원설계도를 찾아냈다. 우리나라 근현대 서양식 건축의 비밀을 풀어 줄 열쇠이자 고종이 꿈꾸던 대한제국 궁궐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발굴된 설계도에는 석조전의 방위별 외관, 문의 구조와 디자인 등이 상세하게 담겨 있다. 설계자인 J R 하딩의 서명과 ‘1898년 2월’이라는 완성 시기가 적혀 있다. 도면에는 ‘Imperial Palace, Seoul(제국의 궁전, 서울)’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김씨는 “설계 당시 석조전이 제국의 정궁으로 활용될 계획이었음을 알 수 있다”며 “덕수궁 중화전(中和殿·보물 819호)이 건립된 게 1902년이니 고종은 중화전 건립에 앞서 이미 석조전을 덕수궁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중화전은 1904년 덕수궁 화재로 소실됐다. 당초 2층이었던 중화전은 1906년 1층으로 복원됐다.

 입면설계도와 석조전의 외형은 거의 일치한다. 정면의 팀파눔(지붕 아래쪽 정면 장식 부분)에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자두꽃) 문양이 조각된 것도 동일하다. 다만 설계도에서는 낮은 삼각지붕이 보이지만 시공할 땐 사라졌다. 굴뚝의 형태도 약간 다르다. 김씨는 “설계에서 완공까지 12년이나 걸렸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술이 들어와 지붕을 평평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황제의 침실엔 발코니=원형의 변화가 큰 건 외형보다 내부다. 김씨가 일본 하마마쓰(浜松) 도서관에서 발굴한 초기 평면도 자료는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김씨는 “일본인 건축가가 석조전을 이왕가(李王家)미술관으로 설계 변경하기 위해 원래 평면에서 벽을 없앨 공간에 X표를 쳐 놓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석조전이 이왕가미술관으로 전용된 것이 1933년이다. X표만 제외하면 원래의 평면을 짐작할 수 있는 셈이다.

 평면도에는 마루·타일·카펫 등 구역마다 바닥의 재료가 표시됐다. 상궁 처소, 주방 등으로 활용된 1층은 마룻바닥의 비율이 높고 황제의 처소 등으로 쓰인 3층은 카펫이 깔린 공간의 비율이 높았다. 타일이 깔린 곳은 욕실·주방 등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평면도상에는 3층 후면에 발코니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김씨는 “발코니가 있다는 건 침실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현재는 발코니가 제거됐고, 발코니로 향하는 문도 창호로 개조된 상태”라고 말했다.

 ◆거북이냐, 물개냐=석조전 권역에서 끈질기게 논란이 돼 온 정원에 대한 의문도 풀렸다. 1910년 석조전 완공 당시의 사진, 1919년 고종 황제 국장 행렬이 등장하는 사진 등 1927년 자료까지는 현재의 분수가 등장하지 않는다.

 김씨는 “헨리 윌리엄 데이비슨이 유럽식 바로크 정원을 조성했다. 당시엔 대칭형 꽃 모양으로 조성된 정원이 석조전을 향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분수대가 등장한 건 일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덕수궁미술관(등록문화재 81호·1936년 완공)의 설계를 시작한 1927~29년 사이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분수대와 거북상이 정확히 등장하는 건 1929년 자료부터다. 이전까지 석조전만 고려해 배치됐던 정원은 이후 석조전·덕수궁미술관·중화전 등 세 건물의 중앙에 오도록 재배치된다. 물개상이 나타나는 건 1940년이다. 따라서 대한제국이 영원하길 기원하며 거북상을 설치한 것을 일제가 물개로 격하시켰다는 일각의 주장은 오류라는 것이다.




1910년 완공 당시 석조전 전경. 바로크식으로 조성한 정원에 분수대가 없다.

 ◆석조전 본뜬 덕수궁미술관=석조전 서관으로도 불리는 덕수궁미술관의 오리지널 평면도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찾아냈다. 덕수궁미술관은 석조전과 외형을 비슷하게 하면서도 철근·콘크리트로 지어 재료의 변화를 보여 준다. 김씨는 “석조전 권역은 그 자체로 근현대 건축사의 중요한 자료다. 그러나 덕수궁미술관은 등록문화재이면서도 일제가 지었다는 이유로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경희 기자  

◆석조전=덕수궁 내에 1901년 착공해 1910년 건립된 대한제국의 황궁. 이왕가미술관(33년), 미소공동위원회 사무실(46년), 국립박물관(55년), 국립현대미술관(73년), 궁중유물전시관(87년)으로 전용되면서 실내 구조가 크게 변형됐다. 현재 원형 복원 공사 중이다.


“석조전, 원 설계도 참고 안 하면 복원이라 할 수 없어”

덕수궁 석조전의 1898년 원본 설계도를 찾아낸 김은주(44) 박사는 현재 진행 중인 석조전 복원의 문제점부터 지적했다. 그는 “원 설계도면을 참고하지 않은 복원은 국제적 기준에서 복원이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인가.

 “석조전은 벽돌조에 석회로 마감한 건축이다. 그런데 현재 복원공사에선 석고보드·합판으로 마감하고 있다. 원재료를 살려야 한다는 건 복원의 제1 원칙이다. 석조전 주변 지면을 평평하게 하느라 계단을 한 단 묻히게 한 것도 문제다. 건물의 습도가 높아져 안전성이 떨어진다. ”

 -다른 근대 건축물은 어떤가.

 “근래 복원된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이나 구(舊) 서울역사 등도 기초자료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것 같다. ”

 -덕수궁은 어떻게 연구하게 됐나.

 “우리나라에서 서양식 근대건축에 대한 연구가 너무나 안 되어 있는 게 답답했다. 독일로 떠나 석사 과정부터 다시 밟았다. 한국에도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하기 위해 석조전을 주제로 택했다. 한국에선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석조전의 건축가를 G R 하딩으로 알고 있었다. 학자들이 옛날 책에 잘못 나온 걸 그대로 베끼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다. 본명이 J R 하딩임을 알아내고 나서야 연구가 풀리기 시작했다.”

 -자료는 주로 어디에서 구했나.

 “지난 5년간 대만·일본·영국 등을 숱하게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했다. 하딩은 석조전을 대만에서 설계했다. 그러나 설계도는 일본에 있었다. ”

 -한국에 전문가가 없나.

 “ 근대건축 복원 전문가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가령 ‘석조전을 뜯어보니 붉은 벽돌이 나오더라’고 말하는 건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럽의 이런 식의 건축은 모두 벽돌을 구조체로 쓰고 마감만 석조로 한다. ”

 -서양 교수들의 반응은 어떤가.

 “극동에 어떻게 이토록 완벽한 팔라디안 양식의 건축이 있을 수 있느냐며 놀라워한다.”

 -팔라디안 양식이 뭔가.

 “16세기 이탈리아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가 신전·궁전 등의 고전 건축을 모방해 빌라 등을 지은 데에서 비롯된 용어다. 이것이 영국을 거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발전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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