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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의 시시각각] 무상급식 ‘프레임’ 싸움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2007년 1월 9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을 전격 제안했다. 담화 후 불과 30분 만에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통렬한 반격이 나왔다. “참 나쁜 대통령”이라는 한마디. 모처럼의 승부수에 끼얹어진, 찬물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염산’급 반격이었다. 이틀 후 노 대통령은 “나쁜 대통령은 자기를 위해 개헌하는 대통령이다. 이번 개헌은 차기를 위한 개헌”이라고 해명했지만 김이 팍 새버린 뒤였다. 청와대 비서관도 나서서 “임기 연장 개헌이나 독재 항구화 개헌, 그리고 그것을 날치기나 폭력으로 추진하려 했던 대통령이 진짜 나쁜 개헌이고 나쁜 대통령”이라고 반박했으나 이미 선점당한 ‘나쁜’ 프레임(frame)에서 헤매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쁜’이라는 간결하고 직관적인 용어가 얼마나 인상 깊었던지 그해 연말 박 전 대표를 꺾고 대선에 나선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도 한마디 보탰다. “박 전 대표의 ‘참 나쁜 대통령’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다. 나는 그 반대로 ‘참 좋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쁜’의 파괴력과 각인(刻印)효과를 이번에는 피해자(?)였던 민주당이 노린 것일까.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나쁜 투표’라며 거부 운동을 벌이는 것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국내에서도 화제가 된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Don’t Think of an Elephant)』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 교수의 ‘프레임’ 이론이 새삼 떠오른다. 한데 무상급식 투표에서도 ‘나쁜’ 프레임이 과연 통할까. 흥미진진한 소재다. 24일 투표 결과가 어떻든 정계·학계에서 찬찬히 복기해볼 만하다.

 투표일까지 남은 닷새는 정치판 셈법으로는 긴 세월에 해당한다. 무슨 일이 벌어져 유권자들 심사가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무상급식에 대한 찬반을 떠나, 적어도 현재까지는 민주당이 ‘나쁜’ 프레임으로 별 재미를 못 본 듯하다. 오세훈 서울시장과의 주민투표 대결에서 시종 소극적인 인상을 풍긴 탓이다. 주민투표 청구인 서명부 활동에 내내 딴죽을 걸었고, 서명부 심사·확인 때도 어깃장 놓기 바빴다. 나름의 법리(法理)와 일정한 민심을 업은 행위였지만 찬성도 반대도 아닌 어중간한 시민들에게는 왠지 켕기는 듯한 인상을 준 게 사실이다. 게다가 투표 자체가 불법이라며 법원 문을 여러 차례 두들기다가 주민투표 집행정지 신청 기각으로 한 방 맞고 말았다. 법원도 “주민투표로 진정한 의사를 확인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해소할 필요성이 상당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민주당은 투표전에서 ‘무상급식 성(城)’을 수호하기 위해 ‘개표 전 승리’라는 성벽 바깥에 해자(垓子)를 하나 더 팠다. ‘투표 원천 거부’라는 방어선이다. 성 둘레 해자는 원래는 ‘무관심’이라는, 아주 얕은 개울이었다. 그러나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뒤늦게 ‘적극적 투표 거부’로 수심을 깊게 팠다. 만일 투표 거부 운동이 먹히지 않으면, 즉 투표율이 33.3%를 넘으면 해자를 건너 본성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득표율 싸움이다. 이중삼중 방어막을 치다가 초점이 흐려지고 공연히 전력(戰力)만 분산된 것 아닐까. 상대가 밀고 들어올 때마다 떡 하나씩 내주고 손 따라 바둑 두는 듯한 인상을 어떻게 불식시킬지 민주당은 고민이 클 것이다.

 사실 결정적인 것은 민주당이 ‘무상’ ‘단계’라는 용어를 내준 점이다. 당초 서울시는 ‘선별 급식’, 민주당은 ‘보편 급식’ 이미지였다. 민주당과 서울교육청 간에 손발이 안 맞은 탓도 있는 듯한데, 여하간 지금은 서울시의 ‘단계적 무상급식’과 민주당의 ‘전면적 무상급식’ 대결로 낙착됐다. 용어 프레임 싸움에서 민주당이 밀린 것이다. “저희(민주당) 손에서 화장품 뺏어다가 자기 얼굴에 화장한 꼴”이라는 이인영 민주당 의원의 푸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번 투표,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가 크고 재미도 있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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