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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황제는 역시…





연암 박지원(朴趾源)이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말하는 열하는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承德市)다. 박지원은 정조 4년(1780:건륭제 45년) 진하별사(進賀別使)의 일원으로 북경에 갔다가 열하(熱河)로 갔다. 박지원이 『열하일기』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에서 “강희제 때부터 여름이면 늘 이곳에 거둥해 더위를 피했다”고 전하는 대로 황제의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있기 때문이었다. 원래 중국 황제들의 피서 별궁은 섬서성(陝西省) 인유현(麟遊縣) 서쪽에 수(隋)나라가 세운 인수궁(人壽宮)이었다. 당 태종이 인수궁을 구성궁(九成宮)으로 개수한 이래 역대 황제들의 피서지였다.

 청나라는 왜 북경 북쪽의 열하를 피서지로 삼았을까?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황제가 피서산장에서 독서하거나 임천(林泉)을 거닐고 휴식하는 것으로 평민이 되려는 뜻 ‘포소지의(布素之意)’를 보였지만 그 실상은 다르다고 보았다. 즉 “몽골의 목구멍을 막을 수 있는 험한 요새의 북쪽 변방 오지여서 이름은 비록 피서(避暑)라고 했지만 그 실상은 천자 스스로 변방 ‘胡’를 방어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순조 28년(1828) 사은사 홍기섭(洪起燮)의 막비(幕裨)로 연경(燕京)에 다녀온 박사호(朴思浩)의 ‘유관잡록(留館雜錄)’에도 “황제가 열하에 거둥하는 명목은 산장 피서지만 사실은 몽골의 목을 잡아 누르자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실제 목적은 피서가 아니라 몽골의 발호를 막기 위한 국방상의 목적이란 뜻이다.

 실제로 청나라 황제들은 왕조의 발상지인 성경(盛京:심양)이나 길림 등지를 순시하는 동순(東巡) 전통이 있었다. 건륭제는 네 차례 성경을 방문해 선조들의 능을 배알했는데, 이때 팔기(八旗)를 동원해 행위연무(行圍演武)라 불리는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황제가 열하에서 사냥하는 것도 휴식을 빙자한 군사훈련이었다. 강희제는 1705년(숙종 31년) 열하에서 서안장군 박제(博霽)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곳 서늘한 관외(關外)에서는 병사부터 심부름꾼까지 모두 천막을 치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산과 강에서 잡은 짐승과 물고기를 먹고, 밤에는 면이불을 덮는다”고 전했다.

 만주족이 1백 배 이상 수가 많은 한족(漢族)을 200년 이상 통치할 수 있었던 비결이 피서까지도 국정의 연장으로 여겼던 치열한 상무(尙武)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도 대통령이 울릉도를 피서차 방문해 독도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이 낚시만 드리워도 그 뜻은 모두 알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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