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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117년 기다렸다 … 바랴크함 첫 시험 항해





본지 객원기자 김명호 교수가 본 중국의 항모 집



중국의 첫 항공모함 바랴크(Varyag)함이 10일 첫 시험 항해에 나섰다. 바랴크함은 이날 오전 다롄항을 떠나 랴오둥만 해역에서 기기 시험을 마치고 복귀했다. 미완성 소련 항모를 개조한 바랴크함은 몇 차례 시험 항해를 한 뒤 실전 배치될 예정이다. 시험 항해를 앞두고 함교 굴뚝에서 연기를 뿜어내는 바랴크함. [다롄 신화=연합뉴스]











김명호 교수



중국의 첫 항공모함인 바랴크(Varyag)함이 10일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항을 떠나 첫 시험 항해에 나섰다. 1998년 우크라이나로부터 사들인 미완의 바랴크함을 수리한 지 13년 만이다. 이로써 중국은 세계에서 열 번째로 항모 보유국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항공모함은 중국 지도자들의 몇 대에 걸친 숙원사업이었다.



 117년 전인 1894년 8월 1일 청일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9월 16일 일본군이 조선 주둔 청군들을 압록강 언저리 중국 쪽으로 몰아붙였다. 9월 17일에는 일본 연합함대가 서해 대동구(大東溝) 해역에서 대청제국 북양함대에 승리,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가을 뤼순(旅順)을 점령한 일본 제2군은 도시 전역에서 살육전을 벌였다. 뤼순에 거주하는 군인과 민간인을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도살했다. 이듬해 2월 북양함대는 류궁다오(劉公島)에서 일본 해군에 투항했다. 중국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명대까지만 하더라도 해양대국이던 중국은 점점 내륙으로 들어갔지만 동시에 해군 강국의 꿈이 서서히 머리 한구석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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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꿈이 110여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마침내 현실이 됐다.



 1928년 국민정부 2함대 사령관 천사오콴(陳紹寬·진소관)이 항공모함 건조계획안을 제출했다. 당시 돈 2000만 위안이면 충분하다고 장담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유럽전선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직접 체험했고, 대독일 잠수함 작전에 직접 참여한 천사오콴의 건의를 가볍게 듣지 않았다. 예산과 민심을 이유로 계획안을 보류시켰지만 못내 애석해했다. 항공모함이라는 괴물이 지구상에 첫선을 보인 지 10년 후였다.



 하지만 천사오콴은 그 후에도 항공모함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중국 ‘항모 아버지’ 류화칭 ‘중국 항공모함의 아버지’로 불리는 류화칭(劉華淸·유화청) 전 군사위원회 부주석이 1980년 미 항모 키티호크함에 탑승해 헬기를 살펴보고 있다. 그는 해군사령관시절 “항모 건조를 보지 못하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올 1월 세상을 떠났다. [김명호 교수 제공]



 신중국 성립 후 국방건설은 다른 것들에 비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53년 12월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제국주의 침략을 막으려면 강력한 해군이 있어야 한다”며 해군건설 의지를 밝힐 때까지 뒷전으로 밀려 있었다.



 3년 후 마오는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육군과 공군 외에 조선업을 일으켜 해상철로를 건설해야 한다”면서 해군 함정건설 8개년 계획안을 제출했다. 첫 단계가 미사일을 탑재한 잠수함과 중소형 함정 건조, 다음 단계가 항공모함 건조였다. 마오의 계획안은 오랜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인재 유실로 실현되지 못했다. 중국 최대 규모의 장난(江南) 조선창에서 1만t 급 화물선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개혁·개방 이후 국가발전의 핵심은 경제건설이었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절실한 것 외에는 군비지출을 억제했다. 항공모함의 꿈은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직접 만드는 것보다 사오는 게 낫고, 사는 것보다 빌리는 게 낫다”는 사고가 만연했다. 빠른 시간 내에 해군력을 향상시키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80년에 들어서면서 영국과 접촉을 시작했지만 허사였다. 값을 너무 비싸게 부르고 기술이전도 거절했다. 하지만 이는 중국 지도자들이 군사강국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중국 해군은 본격적으로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미사일 탑재 구축함 건조에 성공한 게 첫 번째 결실이었다. 항공모함 쪽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각국의 퇴역 항모들에 주목했다. 호주에서 방치해둔 항공모함 한 척을 고철 값으로 구입해 광저우(廣州)의 조선창에서 해체했다. 이를 계기로 항공모함 구조를 처음 파악할 수 있었다. 98년과 2000년 두 차례에 걸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퇴역 항공모함을 구매해 분석과 수리를 반복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은 국력이 종합적으로 상승했다. 2009년 3월 20일 중국 국방부장 량광례(梁光烈·양광열)는 외신 기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대국 중에 중국만 항공모함이 없다. 중국이 영원히 항공모함을 보유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항모 보유 의욕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웃나라 중국이 드디어 항공모함을 보유했다. 중국 항공모함이 동아시아와 서태평양 해상에 적지 않은 파동을 몰고 올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김명호(성공회대 교수) 객원기자



◆김명호=30여 년간 중국 근현대사의 문헌 자료와 영상 자료에 천착해온 중국 전문가 . 중앙SUNDAY의 인기 연재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를 200회 넘게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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