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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수사권









현재의 검찰과 비슷한 기관이 조선의 사헌부(司憲府)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은 5품 하관이 3품 상관에게 절을 해도 상관은 맞절을 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당상관이라도 사헌부·사간원 관리는 우대해서 답례한다’는 예외조항이 있다. 사헌부 대사헌은 종2품에 불과하지만 『연려실기술』 ‘관직전고(官職典故)’는 사헌부 관원이 “정색하고 조정에 서면 모든 관료가 떨고 두려워한다”고 전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다. 사헌부 정6품 감찰(監察)에 대해 성현(成俔)은 ‘감찰청벽기(監察廳壁記)’에서 “감찰이 왔다는 소리만 들려도 사람들이 다 몸을 움츠리고 무서워했다”고 전한다.



 이런 권위는 남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조정 회의 때도 사헌부 관료들은 남보다 먼저 들어갔다가 다른 관료들이 다 나간 후에 따로 나갔다. 뒤섞이면 청탁이 있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관직전고’는 사헌부 관료는 “편복(便服)으로 거리에 나서지 못했고, 친구 초상 때도 반혼(返魂:장례 후 신주를 집으로 모심)할 때 장막을 교외에 쳤어도 감히 나가서 곡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친구의 장례식 참석도 꺼려야 할 정도로 처신에 엄격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 등은 사헌부 감찰에 대해 “남루한 옷에 좋지 않은 말과 찢어진 안장, 짧은 사모에 해진 띠를 착용했다”면서 “비록 귀족이나 명사(名士)일지라도 사헌부의 이런 구규(舊規:관례)를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았다”고 전한다.



 부유한 집안 출신도 사헌부 관료가 되면 가난한 벼슬생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전통이 있었다. 왜냐하면 조선의 수사권은 사헌부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의금부·형조는 물론 한성부와 포도청도 수사권이 있었다. 사헌부는 다른 수사 기관들과 경쟁하며 혹독한 자기 관리로 대표 수사기관이 된 것이었다.



 부산저축은행 변호인이 전직 대검 중수부장이란 보도에다 이번 검찰총장 청문회를 보니 일반 공무원보다 도덕성에서 별반 나은 것 같지도 않다. 저축은행 국조 출석 거부라는 소식까지 접하면 검찰이 시대가 변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에서 권력기관을 상호견제시킨 것은 한 기관이 사회정의를 자의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헌부가 수사를 방기하면 즉각 다른 수사기관이 나서 수사했다. 선조들의 이런 철학을 현재에 되살려 수사권을 분산하는 것이 시대 흐름에도 맞고, 사회정의 실현에도 가까울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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