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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움직이는 종합병원 … 고통이 축복이었다”




하용조 목사는 20대부터 40년 넘게 투병했다. 결핵과 간암, 당뇨 등 몸에 박힌 가시에서 그는 오히려 은혜를 길어올렸다. [중앙포토]


“아픔은 축복입니다. 고통은 내게 깨달음을 줍니다. 밤이 낮을 알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달 31일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온누리교회 주일 예배에서 하용조 담임목사는 강대에 섰다. 마지막 설교였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1일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고, 2일 오전 8시40분 소천(召天·하늘의 부르심)했다. 65세.


이날 온누리교회 서빙고 두란노홀에 마련된 빈소에는 각계 인사들의 조문이 줄을 이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와 이영훈 담임목사, 김성혜 한세대 총장도 조문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중앙일보 문창극 대기자와 함께 빈소를 찾았다. 이 전 장관은 “오랜 아픔 속에서 고인은 아픔을 겪었지만, 그 고통이 남에게 기쁨이 됐다”며 “고인은 그렇게 역설의 삶을 살다 가셨다”고 말했다. 탤런트 한혜진이 “사랑하는 하 목사님 편히 쉬세요.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그 사랑 잊지 못할 거예요”라고 자신의 트위터에 글을 올리는 등 유명 연예인들도 애도의 메시지를 남겼다.

 하 목사는 평소 “나는 움직이는 종합병원”이라고 말했다. 실제 그랬다. 대학생 때는 결핵에 걸렸고, 독한 약을 한 움큼씩 삼켜야 했다. 그 후에 간염·간경화·간암을 차례로 앓았다. 하 목사는 지금껏 일곱 차례 간암 수술을 받았다. 30년 넘게 당뇨도 앓았다. 신부전으로 4시간이나 걸리는 투석을 매주 3회씩 5년 넘게 받았다. 그래도 고인은 “아픈 것이 은혜다. 바늘이 살을 뚫고 들어올 때는 아프다. 그러나 투석 받는 4시간 동안 행복하다. 내겐 큐티(Quiet Time·묵상)의 시간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 목사는 늘 ‘죽음’을 코앞에 두고 살았다.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매번 ‘마지막 설교’를 했다. 하 목사는 “참 이상하다. 나는 설교하면 살아난다. 강대상에만 올라가면 살아난다. 그런데 설교를 안 하면 기가 팍 죽는다. 기운을 못 차린다. 그래서 나는 살기 위해서 설교한다”고 말했다. 그게 간암의 고통 속에서도 설교가 멈추지 않고 달려간 동력이었을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 목사가 스스로 꼽은 영적 멘토는 대학생 때 만난 김용기(1909~88, 가나안 농군학교 창설자) 장로였다. 하 목사는 “그분께 배운 건 나의 청소년기를 지배했던 이광수 소설들의 감동과는 견줄 수 없는 교훈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김 장로의 소원은 일하면서 죽는 것이었다. 실제 그는 강의를 하다가 강단에서 세상을 떠났다. 하 목사는 늘 “그분처럼 사는 것이 나의 소원”이라고 말했다. 하 목사는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날까지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온누리교회는 서울의 대형교회 중 하나다. 교인 수가 7만5000여 명에 달한다. 사회 저명인사는 물론 연예인 신도가 많기로도 유명하다. 하 목사의 출발은 ‘연예인 교회’였다. 1974년 당시 하 목사는 마포교회의 전도사였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교회 장로가 하루는 “후라이보이 곽규석씨 성경공부를 개인적으로 인도해 줄 수 있느냐”고 부탁했다. 그게 첫 단추였다.

 이후 고인은 날마다 방송국을 드나들었다. 연예인만 만나면 방송국 앞 다방에 끌고 내려가서 복음을 전했다. 무안과 모욕도 많이 당했다. 방송국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하 전도사 떴다!”고 소리치며 도망갈 정도였다. 그런데 연예계에 스캔들과 대마초 사건, 뇌물 사건 등이 연이어 터졌다. 방송국에서 쫓겨난 연예인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문을 들어서며 울음을 터뜨렸다. 고인은 그들을 껴안았다. 그렇게 연예인 성경공부의 구성원이 늘었다. 나중에는 가수 윤복희씨와 방은미씨, 쿨씨스터즈가 성가대에서 찬양을 하고, 코미디언 구봉서씨와 명MC였던 곽규석씨가 설교 후에 광고말씀을 전했다.

그렇게 10년을 뛰었던 하 목사의 건강이 악화됐다. 연예인 교회 목회를 멈추었다. 담당 의사는 “목회를 그만두라”고 했다. 고민 끝에 자신의 결혼식 주례를 섰던 고(故) 한경직(1902~2000) 목사를 찾아갔다. 한 목사는 “내가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폐병으로 피를 토했던 경험이 없었으면, 오늘날 목사가 되지 못했을 거다”라고 했다. 결국 하 목사는 영국으로 갔다. 귀국한 하 목사는 85년 온누리교회를 개척했다. 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하 목사는 투병과 교회를 이렇게 빗댔다. “내가 아플 때마다 교회가 성장했다. 참, 이상하다. 고통스러울 때마다 영적인 충만을 경험한다. 병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고, 아픈 사람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하 목사(예장 통합)는 고 옥한흠(예장 합동) 목사를 비롯해 홍정길(예장 합신), 이동원(침례교) 목사와 함께 교권에서 벗어난 4인에 꼽힌다. 교단 총회장을 지내지 않고도 교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유족은 부인 이형기씨와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온누리교회 서빙고 본당 두란노홀, 발인 예배는 4일 오전 9시 서빙고 본당이다. 장지는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궁촌리의 온누리동산. 02-3215-3188, 3224.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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