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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치수





전통 유학 사회는 자연 재해(災害)를 인간의 정사 잘못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봤지만 이에 대한 의문도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성인으로 추앙받는 우(禹)임금 10년 동안 아홉 번이나 홍수가 나고, 탕(湯)임금 8년 동안 일곱 번이나 가뭄이 든 사례다.

 고려 말 가정(稼亭) 이곡(李穀)은 ‘석문(石問)’에서 ‘우(禹)는 뚫어서 용이 되어 날았다(禹鑿龍飛)고 표현했다. 우(禹)는 황하의 물길을 막고 있는 하남성(河南省) 용문산(龍門山)을 도끼로 갈라 물길을 만들었고, 그 공으로 『주역』 구오(九五)의 “용이 날아 하늘에 있다[飛龍在天]”는 효사(爻辭)처럼 순(舜)임금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는 뜻이다. 잉어[鯉魚]가 용문을 뛰어오르면 용이 된다는 등용문(登龍門)이란 말도 여기에서 나왔다.

 사형당한 관료의 아들이었던 우(禹)가 황하의 물길을 잡은 공으로 임금이 되었듯이 중국 역사에서 치수는 중요했다. 천수(天數), 즉 하늘의 운세는 인간이 알 수 없지만 인사(人事)에 지극정성을 다하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라고 옛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래서 이곡은 ‘수재와 가뭄의 원인(原水旱)’이란 글에서 우(禹)임금 10년 동안 아홉 번 홍수가 나고, 탕(湯)임금 8년 동안 일곱 번 가뭄이 들었어도 백성들의 생활이 망가지지 않은[不病] 까닭은 지극한 인사(人事)로 천수(天數)에 응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재해를 천수(天數)라고 핑계대면서 지극한 인사(人事)를 폐하기 때문에 1, 2년 재앙에도 백성들의 시신이 구렁에 나뒹군다고 비판했다. 조선의 유명한 치수가는 미수(眉叟) 허목(許穆)이다. 그가 현종 때 삼척부사로 있으면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삼척포(三陟浦)에 세우자 매년 시가를 뒤덮던 바닷물 범람의 피해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성호 이익은 ‘미수시(眉叟>詩)’라는 글에서 ‘예송 논쟁 이후 이(李)가 성을 가진 재상이 임금에게 아뢰어 그의 글씨체를 금지시키고 동해비를 부숴버리게 했다’고 전한다. 예송논쟁 이후 허목을 미워한 반대 당파의 재상이 척주동해비까지 파괴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호환(虎患)보다 더한 악정이요, 편당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산 정약용은 한사잠(閑邪箴)에서 “개미구멍을 막지 않으면/ 큰 홍수가 넘치게 되리라(螘孔不塞/洚波其滔)”고 읊었다. 개미구멍까지 살피는 인사(人事)로 천수(天數)에 대비하는 것만이 자연재해에 대한 유일한 대비책일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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