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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시시각각] 아직은 민족이다







김환영
중앙SUNDAY 국제·지식에디터




4~5세기 사람인 박제상(朴堤上)은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으며, 차라리 계림의 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이나 녹을 먹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일본에서 장렬히 순국했다. 학자들은 민족주의는 18세기 말 서양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보면 민족·민족주의 관념은 우리나라에 19세기 말, 20세기 초기에나 수입된 것이다. 하지만 박제상의 사례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를 충분히 ‘시원적(始原的) 민족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다.



 고조선은 빼더라도 적어도 17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의 민족주의는 오늘 어떤 모습인가. 취약한 모습이다. 민족주의는 민족의 독립과 통일과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이념이다. 우리의 산업화·민주화 과정에서 급한 불을 끄느라 민족주의는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아왔다. 오늘도 좌파건 우파건 민족주의가 선명히 보이지 않는다. 민족의 이익보다 좌파·우파의 정파적 이익이 우선이다. 좌우파는 상대편이 실수를 많이 하면 할수록 ‘반긴다’. 우리 편이 옳고 상대편은 잘못됐다고 입증하는 사례가 많이 축적될수록 좋다. 정파적 이익이 국가적 이익에 앞서면 그 결과는 뻔하다.



 강한 중도가 어느 정도 좌우파 사이의 균형을 잡아줄 수 있다. 그러나 좌우·중도의 정치는 본질적으로 분열의 정치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한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그래서 더욱 좌우·중도를 초월하는 민족주의가 필요하다. 민족주의는 민족과 개인을 일체화시킨다. 정당 정치에서 상대적인 소외는 불가피하다. 민족주의에는 소외가 있을 수 없다. 민족주의는 누구나 민족 공동체 안에서 자아를 실현하고 공동체를 위해 희생을 주저하지 않게 한다.



 우리 국민의 애국심·애국주의는 상당히 강하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 점이 민족주의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 애국주의(patriotism)와 민족주의(nationalism)의 차이는 명확하지 않다. 학자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차이가 없다면 애국주의·민족주의를 동의어로 쓰면 된다. 정도의 차이, 미묘한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견해가 있다. 애국주의는 수동적, 민족주의는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관점은 애국주의를 발전시킨 게 민족주의라는 주장이다. 애국주의는 감정 차원에 머무는 것이며 민족주의는 고도로 발달한 철학적·정치적 이념이다.



 나라와 민족이 일치하는 우리 특수성이 민족주의의 필요성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게 한다. 기본적으로 애국주의는 ‘나라를 사랑하는 것’, 민족주의는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내 나라’와 ‘내 민족’이 일치한다. 세계에서 예외적인 경우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애국주의는 본능이다. 민족 사랑에는 어느 정도의 정치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뜨거운 애국주의가 우리 민족주의도 강하다는 착시 현상을 낳고 있다.



 민족주의의 빈곤을 못 느끼게 하는 다른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모델로 삼아 온 미국에 민족주의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애국주의는 드러나 있고 민족주의는 감춰져 있다. 미국은 세계를 지배하는 입장이다. 민족주의를 내세워 좋을 게 없다. 미국에서 애국주의는 좋은 말, 민족주의는 나쁜 말이다.



 미국은 민족주의 없이 살 수 있을지 모른다. 유럽만 해도 그렇지 않다. 세계화는 유럽이나 우리나라에 민족주의의 진화를 요구한다.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유럽애국주의(Euro-patriotism)’를 주창한 바 있다. 노르웨이에서 발생한 테러 참극으로 ‘거시민족주의자(macro-nationalist)’라는 신조어가 나왔다. 유럽애국주의와 거시민족주의의 간격은 유럽이 겪고 있는 엄청난 민족주의 진통을 예시한다. 민족주의의 모습은 나라마다 다양하다. 아직은 민족주의의 시대다. 세계에 자신 있게 모델로 제시할 수 있는 우리만의 민족주의 모델을 발전시킬 때다.



김환영 중앙SUNDAY 국제·지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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