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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28) 둘로 갈린 프랑스 유학생들


▲1920년 12월 말, 몽타르지(Montargis)에서 열린 공학세계사(工學世界社) 망년회에 참석한 차이허썬(첫째 줄 왼쪽 넷째). 셋째 줄 오른쪽 다섯째가 리웨이한. 첫째 줄 가운데는 멍다얼파의 후원자였던 샤포(Monsieur Chapeau) 부부와 자녀들. [김명호 제공]

1919년 봄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한 중국인들의 유법(留法·프랑스 유학) 근공검학(勤工儉學·일하며 공부하는) 운동은 해를 넘겨도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특히 상하이 시보(時報)에 “프랑스는 기회의 땅이다. 장차 중국인의 지혜를 계발시키고, 공업의 중심에 서게 될 근공검학생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론이 실리자 열기가 전국적으로 번졌다.

일본 언론은 중국보다 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프랑스의 중국인들을 주시해야 한다. 현재 우리의 대중국 정책은 변한 게 없다. 아직도 타당한지 검토해야 할 때가 왔다.” 레닌이 “베이징은 파리를 돌아서”라는 말을 한 것도 이때였다.

더 이상 너절한 짓 안 하고 살겠다며 프랑스행을 결심한 교사, 기자, 의사, 광부, 군인, 노동자들이 속출했다. 여자들도 많았다. 주색잡기라면 세상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남편을 둔 젊은 여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프랑스에 불경기가 닥쳤다. 공장주들은 언어와 체력이 달리는 중국 학생들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1920년 말부터 이듬해 2월까지 근공검학생의 4분의 3이 일자리를 잃었다. 객지의 겨울은 고향보다 훨씬 추웠다. 제대로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한 중국학생들은 빵 한 쪽 챙겨 들고 센(Seine) 강변의 작은 공장이나 농장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운 좋은 날이면 일감이 있었다. 허탕 치는 날은 낚시터에서 시간을 보냈다. 학업은 사치였다.

근공검학생들은 국내 학생운동의 맹장 출신들이었다. 발설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지역마다 대표를 선출, 파리 근교에 있는 화법교육회(華法敎育會)에서 회의를 열었다. 다수파인 멍다얼(蒙達爾)파는 생존권(生存權)과 구학권(求學權)을 구호로 내걸었다. 중국 정부에 생활비와 학비 지원을 요청했다. 쓰촨(四川) 출신이 많은 노동학회(勞動學會)는 공장에서 일만 하게 해달라며 노동권(勞動權)을 요구했다.

두 파벌은 회의장에서 서로 공격하며 충돌했다. 노동권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일해서 먹고 살길을 찾으려 하지 않고, 정부에 책임을 떠 넘기는 기생충”이라며 멍다얼파를 공격하자 멍다얼파는 “정부의 책임을 묻기는커녕 군벌정부에 매수된 쓰레기들”이라고 반격했다. 주먹질 일보 직전까지 갔지만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프랑스는 병원비가 비싸다”며 만류하자 겨우 수그러들었다.

마침 프랑스에 와있던 전 베이징대학 총장 차이위안페이(蔡元培·채원배)와 우즈후이(吳稚暉·오치휘)가 문제 해결에 나섰다. 근공검학 운동을 전개한 장본인들이었다. 화법교육회가 차이위안페이의 의견이라며 학생대표들에게 통고문을 보냈다. “화법교육회는 근공검학생들에게 아무런 경제적 책임이 없다. 대신 정신적으로 학생들을 지원하겠다.” 중국 교육계와 정계의 원로였던 차이위안페이의 위신은 하루아침에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1921년 2월 말, 멍다얼파의 영수 차이허썬(蔡和森·채화삼)이 각지의 근공검학생들을 파리로 소집했다. 차이는 세수와 이발을 거의 안 하고 마르크스주의 서적만 탐독했다고 한다. 집회에도 나가는 법이 없었다. 친구도 고향에 있는 마오쩌둥이 유일했다. 나머지는 모두 부하였다. 할 말이 있으면 멍다얼파의 핵심인 공학세계사 대표 리웨이한(李維漢·이유한)을 통해서 했다. 사람들은 리의 말을 차이의 지시로 알고 복종했다.

차이허썬과 마오쩌둥은 생각도 비슷했다. 차이는 근공검학생으로 프랑스에 왔지만 노동과 학업의 병행은 불가능하다며 학교나 공장 문턱을 밟은 일이 없고, 마오도 프랑스로 떠나는 친구나 후배들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지만 정작 자신은 중국을 뜨지 않았다.

1921년 2월 28일, 파리에 집결한 멍다얼파와 동조자들이 프랑스 주재 중국공사관을 포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 공사관 측은 학생들을 해산시켜 달라고 프랑스 경찰에 요청했다.

학생들은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대들지 말라는 차이허썬의 지시를 어기지 않았다. 머리통이 깨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얻어맞은 학생이 부지기수였다. 공사관 점령에 불참했던 쓰촨파도 중국 학생들이 얻어맞았다는 소문을 듣자 분개했다.

“28운동(二八運動)”은 겉으로는 실패했지만 성공한 운동이었다. 차이허썬이 쓰촨파 영수 자오스옌(趙世炎·조세염)과 노동학회 대표 리리싼(李立三·이립삼)을 멍다얼에서 열리는 신민학회(新民學會) 회의에 초청하자 두 사람은 군말 없이 응했다. 차이가 “허구한 날 싸우다 보니 싸울 거리도 바닥이 났다. 이제 할거라곤 친구가 되는 것밖에 없다”며 손을 내밀었다.

이때 프랑스 정부가 의화단 사건 이후 중국에서 강탈해 가다시피 한 배상금을 돌려주겠다는 선언을 했다. 단 프랑스 경내에서 중국의 문화사업을 위해 써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근공검학생들은 프랑스에 와있는 자신들이 수혜 대상이라며 즐거워했지만 차이허썬의 생각은 이들과 달랐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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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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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