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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PT 하겠다는 이 대통령에 “1시간 레슨 받으세요”

지난 5월 테렌스 번스의 총지휘 아래 스위스 로잔서 열린 한국 팀의 프레젠테이션 연습. 사진 앞줄 맨 왼쪽부터 나승연 대변인, 김연아 선수,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 [중앙포토]
“회장님은 그 부분에서 단상에 오르는 연아에게 손을 내미는 신사의 모습을 연출해 보세요.” “또박또박, 리듬감 있게 따라하세요, 애-쓸-리-이-츠(athletes)! 오케이. 강세를 1음절에 두면서 좀 더 크게 한 번 더!”

‘평창 2018’ 지휘한 PT의 달인 테렌스 번스

지난 5월 17일 스위스 로잔 올림픽 박물관. 다음 날로 예정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상대 테크니컬 브리핑을 앞두고 평창 유치위원회의 프레젠터(프레젠테이션(PT)을 하는 사람)들이 최종 리허설 중이었다. 조양호 유치위원장, 박용성 대한체육회장, 김연아 선수가 단상에 섰다. 그들에게 때로는 불호령을, 때로는 큰 박수를 보내며 프레젠테이션의 총 지휘봉을 잡은 이는 컨설턴트 테렌스 번스(53·아래 사진)였다.

1m95㎝의 거구. ‘헬리오스 파트너스’의 대표인 그는 셔츠를 팔뚝까지 걷어붙이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장관·회장들을 몰아세우며 두 시간 넘게 리허설을 이끌었다. 그 이전 사흘 넘게 계속된 리허설에서도 프레젠테이션 출연자들은 종일 계속된 하드 트레이닝으로 진을 뺐다.

테렌스 번스
번스는 평창이 공식 후보도시로 지명된 후 열린 멕시코의 아카풀코 국가올림픽위원회연합회에서의 첫 PT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최종 PT까지 평창이 던질 메시지 ‘새로운 지평’을 고안하고 기획하고 감독했다. 대본을 쓰고 발음에서 손·발 몸 동작까지 일일이 지도했다. 평창 PT의 총감독이었던 셈이다. 굴지의 회장님들까지 ‘들들 볶는’ 다혈질이기도 하다. 최종 PT 준비 과정에선 이명박 대통령이 “영어로 PT를 하겠다”고 하자 “그렇다면 예외 없이 내게 한 시간 코칭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해 관철했다.

‘PT의 달인’으로 통하는 번스는 사실 평창에 두 번의 패배를 안겼던 적장이다. 번스가 PT를 지휘했던 캐나다의 밴쿠버와 러시아의 소치는 평창을 꺾고 각각 2010, 2014년 겨울올림픽 개최권을 따냈다. 번스가 이끄는 헬리오스 파트너스는 올림픽 유치전에서 무패 행진 중이다. 소치의 유치위원장 드미트리 체르니셴코는 승리 후 외신 인터뷰에서 “번스가 없었다면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그런 그를 평창이 영입한 것을 두고 한 외신기자는 “평창의 승리를 예감했다”고 말했을 정도다. 평창 승리 직후에도 번스는 러시아 소도시 카잔의 세계수영선수권 대회 유치를 성공시키며 연속 승전보를 울렸다. 평창 승리 뒤 미국 애틀랜타의 집에서 휴식 중인 그에게 ‘PT의 성공학’을 e-메일로 물었다.

-훌륭한 PT의 기본은 뭔가.
“가장 중요한 건 ‘누구’와 ‘왜’ 두 가지다. PT에 참석한 청중이 누구인지를 아는 게 열쇠다. 그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 마음을 얻는다. 하고 싶은 얘기를 하면 십중팔구 실패다. 평창 유치전에서 청중은 IOC 위원들이다. 그들에게 ‘왜 평창이 돼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게 관건이었다.”

-‘새로운 지평’이라는 테마는 그런 배경에서 만든 건가.
“그렇다. 지난 두 번의 실패 요인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했다. 더 이상 ‘올림픽이 남북의 평화를 증진할 수 있다’라는 메시지는 통하지 않는다. IOC 위원들에겐 식상한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듣고 싶은 새로운 메시지는 뭔가. 그걸 알아내기 위해 우린 몇 개월 동안 연구를 하며 평창의 브랜드 지도를 그려나갔다. 그 과정에서 계속 IOC 입장에서 질문을 던졌다. 최근 IOC는 올림픽 개최를 통해 새로운 유산을 만들어 내는 걸 중시한다. 그래서 초점이 ‘평창=새로운 아시아 시장 개척’으로 모아졌다. 그래서 ‘새로운 지평’이란 테마가 탄생했다.”

-최종 PT엔 감동과 웃음을 버무렸다는 느낌을 받는다.
“감정에 충실할 때 좋은 PT가 나온다. 청중의 머리가 아닌 마음을 두드려야 한다. 감정을 건드리는 건 믿을 수 있는 ‘스토리’다. 그것도 청중의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만큼 강렬해야 한다.”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이 본지와 인터뷰에서 토비 도슨의 스토리가 와닿았다고 평가했었다.
“PT 대본이 아무리 훌륭해도 프레젠터들이 잘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 처음엔 토비 영입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밀고 나갔고, 조 위원장도 내가 결정할 수 있게 힘을 실어줬다. 토비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돼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기까지 겪은 개인사엔 단순명확하며 강렬한 메시지가 있었다. 이 메시지는 평창의 테마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평창 프레젠터 개개인은 어떻게 보나.
“이명박 대통령은 재미있는(funny) 분으로 기억한다. 미국에서 출마한다면 기꺼이 한 표 던지고 싶을 정도다. 어디에서 말을 끊어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조양호 위원장은 PT에서 가장 큰 발전을 이뤘다. 불평 없이 연습을 계속했다. 그를 영화 ‘킹스 스피치’(연설 울렁증을 가진 영국 조지6세의 고군분투기)에 나오는 캐릭터에 비유하기도 했다. 박용성 회장은 타고난 쇼맨십으로 청중을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잘 알았고, 평창 유치에 대한 열정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김연아 선수는 타고난 무대 체질이고 테레사(나승연 대변인)는 내가 지금껏 일해본 사람들 중 단연 최고다.”

-한국인들에게도 영어 PT의 부담이 더 커지고 있다. 조언을 해달라.
“가장 중요한 건 ‘천천히 말하라’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경우엔 특히 단상에 오르면 감정 과잉 때문에 말이 빨라지는 경향이 있다. 페이스와 강약 조절은 운동뿐 아니라 PT에서도 중요하다. 한국인의 정체성도 버리면 안 된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아시아인들이 너무 서구 스타일로 PT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일본의 도쿄가 2016년 여름올림픽 유치전에서 그랬다. 그들은 애써 서양식 농담을 하고 오버 액션을 했는데 감동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무리하는 것처럼 보여 마이너스가 됐다. 결국 유치엔 실패했다.”

-정체성을 지키면서 국제적 매력도 가지라는 건, 너무 어렵지 않은가.
“당연히 쉽지 않다.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열심히 하는 자세와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글로벌한 매너를 익히는 방법을 연구하면 된다. 그리고 PT에서 검은 양복 차림의 남성들만 나서는 것이 아니라, 연령·성별로 다양한 프레젠터를 적극 기용하는 것도 좋다. 무엇보다 한국인은 열심히 노력하는 DNA를 갖고 있다. 러시아 소치가 결정됐던 유치전에 일할 땐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대통령과 함께 연습한 시간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평창의 프레젠터들은 오히려 나에게 ‘더 열심히 연습하자’고 했다.”

-한국인에 대한 인상이 좋아졌겠다.
“6·25 참전용사였던 아버지가 ‘한국인들의 근면함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말하곤 했는데, 이젠 무슨 말인지 잘 알겠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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