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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해서 강한 네덜란드

1596년 겨울, 네덜란드 선박이 러시아 노바 젬블라 섬 인근을 지나던 중 빙하에 걸려 발이 묶였다. 빌렘 바렌츠 선장과 17명의 선원들은 수개월 동안 사냥으로 목숨을 부지하면서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다. 결국 8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들은 위탁받은 고객들의 화물에는 손 대지 않았다. 그 속에 옷과 약품이 있었음에도. 봄까지 살아남은 선원들은 손상되지 않은 화물을 고객들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네덜란드에선 잘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신뢰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긴다. 17세기에 네덜란드 상인들은 고객 신뢰를 바탕으로 세계 해상 상권을 장악했고, 네덜란드는 제국을 이루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상대방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자동차보험에 가입할 때 무사고 증명서 같은 서류들을 제출하지 않아도 전화로 간단한 질문에 답하면 바로 처리된다. 회원제 운동클럽에서 그냥 회원이라고 말하면 굳이 회원카드를 보자고 하지 않는다. 약속도 일상화돼 있다. 이발소는 물론 자동차 매장에도 예약을 하고 간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체면치레로 또는 인삿말로 또는 적당히 둘러대려고 진실 아닌 말을 하지 않는다. 조만간 점심 한번 먹자고 말했다면 이튿날 언제 하겠느냐고 묻는 전화가 올 것이다.

일전에 한국 대기업이 네덜란드 세관직원 반 덴 베르흐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네덜란드 대표인 그는 유럽연합(EU) 수입품 품목분류회의에서 우리 기업에 유리한 입장을 지켜 주었다. 그 기업은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반 덴 베르흐 부부를 방한 초청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점잖게 거절했다. 대가성은 없지만 공무원 행동강령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그 기업은 그냥 있을 수 없어 전자제품 두 개를 선물로 보냈다. 며칠 후 반 덴 베르흐로부터 e-메일이 왔다. 성의있는 선물에 감사한다는 내용과 함께 그것들을 상사에게 보고했고 협의를 거쳐 두 제품을 EU에 파견된 세관 직원의 공무용으로 쓰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만난 네덜란드 공무원들은 한결같이 성실하고 청렴하다. 그들은 숲에서 걷기, 자전거 타기, 집 앞 운하에서 낚시하기 등 아주 평범하고 건전한 여가활동을 가족과 함께 즐긴다. 세계투명성기구(TI)에서 매년 발표하는 국가별 반부패지수에서 네덜란드가 북유럽 국가들과 함께 최상위권에 속하는 이유다.

최근 네덜란드 경제단체들이 변화하는 세계 경제환경과 도전에 직면해 지속 발전 방안을 담은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이 건의서에는 ‘정직, 신뢰, 청렴(transparency)과 같은 가치가 경제를 잘 움직이게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신뢰의 사회경제적 효용, 바꾸어 말하면 불신의 비용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여름 서울에서 사온 선글라스에 흠이 생겨 안경알을 바꾸려고 우리가 사는 바세나르 동네 안경점을 찾아 갔다. 주인 아저씨는 같은 안경알을 주문해 받는데 열흘쯤 걸린다고 하면서 안경을 맡겨 놓으라고 했다. 열흘 후 전화가 와서 안경을 찾으러 갔다. 새 안경알이 끼워진 안경을 건네 받고서 돈을 지불하려고 하자 주인 아저씨는 이번에 교체한 안경알은 거래하는 공급사에서 거저 받았기 때문에 돈을 낼 필요가 없다고 사양했다. 그래도 돈을 내려고 하자 자신들의 비용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돈을 받지 않는 것이 맞다고 버텨, 할 수 없이 ‘정말 고맙다’는 인사만 했을 뿐이다.

장사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네덜란드 상인들은 정말 정직하게 사업을 하고 있다. 선글라스를 낄 때마다 정직한 안경점 아저씨가 떠오른다. 우리가 보기에는 요령 없고 앞뒤 막힌 것처럼 보이지만 정직한 사람들이, 작지만 강한 네덜란드의 진정한 힘이 아닐까?



곽성규 49세.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 경북대 행정대학원 석사. 외시 25회. 중국·이스라엘·호주·방글라데시에서 근무했으며 중동과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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