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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인 서정과 나긋나긋한 터치 난해한 리스트의 문을 열다

피아니스트 밴 클라이번은 스푸트니크호 발사 성공으로 한껏 고무된 소련에서 열린 1958년 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그의 우승은 문화적 열등감에 빠져 있던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음악으로 냉전을 극복할 수 있다’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인에게 밴 클라이번은 음악가 이상의 존재로 여겨진다.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부천시향 협연, 20일 부천시민회관

손열음은 밴 클라이번이 만든 동명의 국제 콩쿠르에서 2009년 준우승을 비롯해 대형 경연에서 여러 차례 입상했다. 뉴욕 필, 이스라엘 필과 협연했고 여러 장의 음반을 남겼지만 자칫, 그간의 경력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 도전에 나섰다. 지난달, 4년마다 열리는 메이저 대회인 14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출전한 것이다. “우승이 아니면 손해”라는 주위의 우려가 있었지만 결국 두 개의 특별상과 준우승을 거뒀다. 우리에게 손열음은 앞으로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차이콥스키 콩쿠르 직후 국내 공연계는 손열음 영입에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달 22일 금난새 지휘, 인천시향과의 협연에 이어 다음 달 대관령 음악제, 수원 ‘피스 & 피아노’ 페스티벌, 9월 ‘7인의 음악회’에서 손열음을 만날 수 있다. 내년 5월에는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의 협연이 예정되었다. 이에 앞서 ‘모스크바의 히로인’을 만나는 첫 무대가 20일 부천시민회관에서 열렸다. 파트너는 지휘자 박영민과 부천시향, 프로그램은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손열음은 그동안 특정 작곡가와 사조에 몰두하기보다 피아노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제너럴리스트’로 분류되곤 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이후 하노버 음대로 진학해 슈베르트 해석에 깊이를 더할 때도 이처럼 보편적인 음악 작품에 집중하는 흐름은 계속됐다.

그러다 올해 리스트 탄생 200주년을 맞아 전문가의 면모를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그는 10월부터 금호아트홀에서 세 차례에 걸친 리스트 리사이틀을 준비 중이다. 타고난 테크닉과 명석한 두뇌라는 두 무기를 손에 쥔 손열음에게 리스트만큼 매력적인 작곡가도 없다. 난곡들을 켜켜이 해체했다가 자신의 브랜드로 되씹는 과정이 다른 작곡가 작품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날 베토벤 ‘프로메테우스’ 서곡에 이어 무대 위에 녹색 드레스 차림으로 등장한 손열음은 연주 직전 스태프를 불러 피아노 받침대의 조절을 요구할 만큼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내내 보였던 무르익은 여유가 묻어 나왔다. 손열음은 협주곡의 전형적인 3악장 구조가 아니라 단악장 6부로 짜인 곡의 특성을 감안해 에피소드가 변하는 지점에서 다채로운 표정 변화를 기했다. 테마를 펼치고 대조하고, 설명하고 수렴하면서 리스트가 은유한 감정이 하나씩 드러났다.

피아니스트는 로맨티시즘을 연결고리로 이들을 이어갔다. 연결부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시적 서정과 나긋나긋한 소프트 터치로 관객들은 화려한 리스트를 들으면서도 쿠션이 뛰어난 소파에 앉은 느낌을 공유했다. 기교가 요구되는 곡에서 여백을 찾아내는 손열음의 넓은 시야는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승부할 핵심 역량이 될 것이다.

이미 리스트의 또 다른 협주곡 1번을 메이저 오케스트라인 뉴욕 필하모닉, NHK교향악단과 협연했던 경험 덕분에 리스트 해석을 두고 악단과 갈등을 빚진 않았다. 손열음은 협주곡 2번을 국내외를 통틀어 한 차례밖에 연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열음의 어린 시절을 잘 아는 부천 필은 넉넉한 포용으로 피아노를 감싸안았다.

마지막 여섯 번째 에피소드에서 손톱으로 건반을 좌에서 우로 멋지게 미끄러뜨리는 글리산도로 손열음은 막판 스퍼트에 시동을 걸었다. 관객들은 이미 손열음의 리스트에 동화되었고 자연스레 모스크바에서 이룬 승리의 실체를 체감했다. 리스트란 거대한 벽이 손열음의 손으로 조금씩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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