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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임홍재(1942~79·37세), 전재수(1940~86·46세), 채광석(1948~87·39세), 박정만(1946~88·42세), 기형도(1960~89·29세), 고정희(1948~91·43세), 김남주(1946~94·48세)….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20> 어두운 시대, 요절한 시인들

1970년대 막바지부터 90년대 초반 사이의 10여 년간 2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 한 시인들이다. 모두 나와는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그 가운데 서넛은 혈육 못지않은 정을 나누던 시인들이다.

우선 죽음의 원인부터 살펴보자. 임홍재는 ‘육성’ 동인(정대구·이인해)과 함께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중 노래를 흥얼거리며 청량리 둑방길을 걷다가 자석에 이끌리듯 떨어져 숨을 거뒀다. 전재수는 집에서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겠다며 집을 나서다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며 아래로 굴러 떨어져 숨졌다. 채광석은 새벽에 귀가하려 택시를 기다리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타계했다. 박정만은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돼 온갖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뒤 술과 방황으로 일관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기형도는 새벽에 심야극장에서 잠자는 듯 숨을 거뒀다. 고정희는 지리산 등반 도중 실족사했다. 김남주는 ‘남민전 사건’으로 10년 가까이 복역한 뒤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어찌 보면 인간사회에 흔히 있을 수 있는 병사(病死)요 사고사다. 하기야 박정만처럼 ‘나는 사라진다 /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라고 한다던가, 기형도처럼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라는 시구로서 죽음을 예감하기도 했다지만 누구나 막연하게나마 죽음을 예감하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면 그 또한 대수로울 것이 없다.

한데 나는 위의 시인들이 죽었을 때마다 그 ‘각별한 의미’를 캐내려 고심했다. 김남주가 죽었을 때는 시를 종교에 비유한 어느 철학자의 글을 인용해 그 의미를 천착하려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러다가 몇 해 전 인터넷을 둘러보다가 한 젊은 철학도의 사이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하게 됐다.

‘세인의 죽음과는 달리 시인의 죽음은, 사뭇 잊고 살았던 삶의 근원적 의미를 채근하게 된다. 자명하게만 다가왔던 우리네 삶이 어느 순간 한없이 낯설어진다. (중략) 시인의 죽음은 모든 존재가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 와해되는 서글픔이 아니라, 마치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본향에로의 황홀한 귀향과 같다. 어쩌면 시인에게 있어서 암울한 현실은 언제나 면역 결핍의 영역이다. 오히려 시인의 고향은 삶 저편의 신성한 숲일는지도 모른다.’(전철, ‘시를 읊은 삶, 칼 구스타프 융을 회상하며’ 중에서)

시인이 살아 있는 동안 그에게 암울한 현실은 마치 면역되지 못하는 질병 같은 것이지만 일단 죽게 되면 그 죽음은 엄마의 품속 같은 따뜻한 고향에로의 회귀가 될 것이라는 뜻이리라. 그렇게 보면 이들 젊어서 죽은 시인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 듯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들의 시와 삶에서 한결같이 ‘시대의 아픔’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민중시를 쓰면서 ‘급진적 좌파 비평가’로서의 격한 몸짓을 보였던 채광석이나, ‘여성해방 전사’로 불리던 고정희나, 투쟁적이고 전투적인 시로 일관했던 김남주는 말할 것도 없고 맑고 투명한 영혼으로 삶의 구석구석을 관조했던 임홍재나 박정만이나 기형도도 마찬가지다.

결국 그들의 시와 삶이 ‘시대의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면 그들의 죽음은 그 아픔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본향에로의 회귀였던 셈이다. 그것은 박정만이 죽었을 때 기형도가 독백처럼 내뱉은 한마디로 집약돼 나타나고 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나와 박해현과 함께 문상을 가는 차 중에서 기형도는 박정만이 타계하기 전에 봇물처럼 시를 토해내던 일을 상기시키면서 ‘이 세상에 박정만처럼 행복한 시인이 또 있을까’ 웅얼거렸다. 곧 시인으로서의 박정만의 죽음은 행복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박정만이 죽은 뒤 5개월여 만에 세상을 등진 기형도 역시 그 전 몇 달 사이에 생애를 통틀어 가장 많은 시를 썼으니 그들에게 있어서 시는 곧 죽음이었을까, 아니면 죽음이 곧 시였을까.

죽기 전에 시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나와 동년배였던 전재수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시를 쓰려면 확고한 시론을 갖춰야 한다’며 40대를 넘어선 나이에 대학원에 입학하기도 했고, 전에 없이 강한 의욕과 열정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에 대한 다소 입맛 쓴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의 일이다. 계엄령이 발동하고 서울 시청에는 소위 ‘신문검열단’이 들어앉아 매일 매일의 신문을 사전 검열하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전재수가 그 검열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사실을 알 수가 없었는데 어느 날 그날치 신문의 검열을 받고 돌아온 신문사 후배들이 검열단에서 누군가 내 안부를 물으며 자신의 이름까지 밝히더라는 것이다. 그 사람이 전재수였다. 연유야 어떻든지 간에 그것이 자랑스러운 경력이 될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 이후 시인들의 술자리에서 여러 차례 만났지만 전재수도 나도 검열단 일에 대해서는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 일 역시 ‘시대의 아픔’ 가운데 하나였다면 전재수도 뒤늦게나마 시에 집착함으로써 그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전재수는 성정이 다소 거칠고 격한 면도 있어서 술자리 같은 데서 시인 친구들과 다투는 일이 잦았다. 그래도 ‘경상도 사나이’답게 붙임성이 있어서 그를 좋아하는 시인친구도 많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이어서 그의 장례는 몇몇 시인만 참석한 채 간소하게 치러졌다. 한데 그의 영정 앞에서 가장 서럽게 오열한 사람은 그와 가장 사이가 나빴던 시인이었다. 그때 나는 ‘어떤 시인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조그마한 칼럼에서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렇게 썼다. ‘이처럼 어지러운 시대를 함께 살면서 현실적인 삶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시를 속절없이 경쟁하듯 써 왔다는 아픈 동류의식 때문은 아니었을까.’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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