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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김중만 “그녀 앞에선 명품 시계가 부끄러웠다”





32년 교유했던 ‘누이’ 위해 … 캄보디아에 ‘김점선 미술학교’ 열다



김중만씨가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인근에 문을 연 ‘김점선 미술학교’에서 여학생에게 그림 그리는 방법을 조언하고 있다. 벽 위에 김점선 화백의 사진이 걸려 있다.



지난달 28일 캄보디아 서북부의 앙코르 첨 마을. 세계적 유적지 앙코르 와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의 한 시골 학교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사진가 김중만(57)씨였다. 새로 들어선 하얀 교사(校舍)에 꽂힌 그의 눈이 어느새 촉촉해졌다. ‘김점선 미술학교’. 2009년 세상을 떠난 화가 김점선을 기리기 위해 그가 지은 곳이다. 이날은 개교식 날이었다. 누나라 불렀던 여인, 영혼을 나눴던 예술가. 둘은 그렇게 32년을 교유(交遊)했다. 현지에서 만난 김중만씨는 독자들에게 격정적 언어로 털어놓았다. 그녀와의 추억, 그것을 매개로 한 자신의 사진 인생까지.



글=김준술 기자

사진=유상은(스튜디오 벨벳 언더그라운드)









김점선 미술학교의 학생들.







소박·진솔했던 누나, 김점선



김점선 미술학교는 약 66㎡(20평) 크기다. 두 칸의 교실이 있다. 사진전을 열어 번 수익금 1억원이 들어갔다. 공사 실무는 국제아동후원단체인 플랜(Plan) 코리아가 맡았다. 김중만씨와 기자가 찾았을 때 맨발의 아이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열심히 붓이며 펜을 놀리고 있었다. 학교는 김점선 화백의 자유분방함을 닮았다. 재학생뿐 아니라 인근 마을 아이들에게도 개방할 계획이다. 김중만씨는 벽에 걸린 김점선의 사진 앞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김 화백 기억이 많이 나는 것 같다.



 “항상 그를 만나면 내가 부끄러웠어. 차고 있는 시계를 그 사람 앞에 꺼내는 게 부끄러웠고. 그래서 그 사람을 존경했던 거지. 소박하고 진솔하고 허영과 위선이 없는 모습을….”



●언제 처음 연(緣)을 맺었나.



 “77년 내가 귀국할 때 개최한 사진 전시회에서 처음 만났어. 김 화백이 “네 사진 참 좋다” 이렇게 대뜸 반말로 그러는 거야. 당시 나는 ‘참 신기한 여자도 있네’ 그렇게만 생각했지. 이후 길을 가다 김점선 전시회라고 써 있는 걸 보고 들어갔어. 어린애가 그린 듯한 그림이 있는 거야. 너무 좋았어. 그 뒤로 친구가 된 거지.”



●무엇이 둘을 엮었나.



 “오랜 시간 같이 서로 위로하고, 남을 욕하지 않았어. 그게 우리의 공통점이었지. 그런 모습이 좋았지. 나는 단점이 많은 사람이야. 위선도 있고, 허영도 있고. 김 화백을 만나면서 더 진실한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가장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글쎄. 딱히 회상할 건 없어. 만나면 그냥 웃고 얘기하고 그랬지. 누나가 나한테 ‘뭐하고 살았느냐’고 물으면, 나도 똑같이 묻고. 헤어질 때는 ‘나, 간다’ 이러면, 누나도 그냥 ‘가라’고 말하고.”



●두 사람의 일상 자체가 모두 소중했던 것 같다. 김 화백이 떠났을 땐 어땠나.



 “죽을 것 같더라고. 며칠간 술을 엄청 퍼마셨지. 그리고 누나가 더 나빴던 게 있어. 나한텐 ‘아프다’고 얘기도 안 했어. 물론 암에 걸리고 투병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지만, 아프다고 말했으면 조금 더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을 거야. 사실 현식이도 마찬가진데….”



●가수 김현식 얘긴가.



 “맞아. 현식이가 나와 마지막 사진 작업을 하는데 그러더라고. ‘형, 이번에는 내가 원하는 곳에 가서 찍자’. 그래서 부산 해운대에서 사진을 찍었지. 비 오는 날에 말이야. 그리고 며칠 있다 현식이는 세상을 떠났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떠나 보내는 마음은 정말….”



 김중만씨는 캄보디아 학교 건립과 함께 최근 『김점선 그리다』(동화출판사·문학의문학)라는 헌사집도 냈다. 강렬한 원색의 말·꽃을 주제로 삼은 김 화백의 그림과 자신의 사진을 수록했다. 권용태(시인·김점선 기념사업회장)·김수경(작가·우리들제약 대표)·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조영남(가수) 등 김 화백과 친분 있던 인사들의 애틋한 추모 글도 실렸다.









김점선 화백의 그림과 사진가 김중만씨의 사진. 『김점선 그리다』란 책에 함께 수록됐다. 다른 날짜에, 서로의 작품을 보지 않은 채 그리고 찍은 작품이다. 김중만씨는 “책을 내기 위해 둘의 자료를 모으다 비슷한 작품이 많아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책을 보니 둘의 사진과 그림이 닮았다. 서로 보고 작업한 것처럼.



 “모두 다른 데서 각자 작업한 그림과 사진들이야. 나도 책을 내려고 자료를 모으다 깜짝 놀랐지. 다른 공간과 시간에서 나온 작품들이 어떻게 이렇게 흡사할까 하고. 사람의 영혼이란 게 그렇게 다른 시공에서 만날 수 있는 거야. 또 굳이 말을 나누지 않더라도 인간의 마음에 꽂히는 진실 같은 게 있는 거고. 그런 걸 발견하니 참 재밌더라고.”



사진은 전쟁이야



●김점선 화백을 그리며 사람을, 그리고 인생을 되돌아본 것 같다.



 “사람들은 나를 화려하게 쳐다보지. 그런데 이번 책 서문에서 난 ‘반평생 컴컴한 밤인 세상을 살아왔다’고 고백했어. 난 낙천적이야. 하지만 삶을 살아온 과정이 항상 밝고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어. 그래서 더 사람들에게 고맙지. 내 내면엔 어둠이 있는 건 확실해. 이젠 그런 걸 감추고 싶진 않아. 사람들은 나름의 생각과 기대로 사진에 있어 나를 ‘롤 모델’로 생각하곤 하지. 그런데 내 스스로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



●롤 모델이라고 꼭 완벽한 존재는 아닐 텐데.



 “나는 부족함이 있는 사진가야. 아직 대접받을 수 있을 만큼 진솔함을 다한 작업을 하지 못했어. 더 깊은 곳에서, 나는 전쟁을 하고 있거든.”



●전쟁이라니?



 “김중만에게 사진이란 전쟁 같은 존재지. 살벌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절박감이 있어. 난 행복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어.”



●누구와, 무엇과 전투를 벌이는 건가.



 “세상의 사진작가들과, 혹은 사진의 역사와 전쟁을 하는 거지. 한국인으로서 세계시장에 나가서 인정받고 개척한다는 게 얼마나 살벌하고 지독한지….”



●그래도 많이 인정받지 않았나.



 “끊임없이 스스로 채찍질했고, 절제했어. 사진 하나만은 순결해. 나는 ‘대한민국 최고 사진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딱 한 번도. 단지 ‘세상의 다른 사진가들과 싸워서 이기겠다’는 마음은 먹었지.”



●번뇌가 많은 것 같다. 행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일을 하나.



 “물론 행복한 순간도 있어. 점선이 누나가 세상을 뜨고 나서 내 제자들 데리고 앙코르 와트 와서 사진을 찍을 땐 행복했어. 누나를 위해 학교를 하나 세워줘야겠다 마음먹고 정말 열심히 찍었지. 전시회로 그림을 팔아서 결국 학교를 세웠고. 이제 여기서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을 보고도 행복감을 느껴. 다만 삶은 매번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지는 건 아니잖아.”



●평소 사진작가 대신 사진가로 불리고 싶어하는데.



 “좀 더 심플한 사람으로 살고 싶어. 내가 ‘작가’이고 ‘예술가’라고 스스로 자평하기엔 너무 부족한 게 많고. 물론 언젠가는 그렇게 되고 싶은 소망은 있지.”



날 강하게 만든 건 고생



●원래는 그림을 전공했지 않나.



 “아프리카에서 살다 1972년 프랑스로 가서 니스 국립응용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배웠지. 그러나 그림은 생산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고. 사진에 매료된 건 빠른 시간에 만들어 낼 수 있는 메커니즘 때문이었고. 내 급한 성격의 DNA와 훨씬 자연스럽게 잘 맞았어. 그리고 벌써 37년이 흘렀네, 사진가로 말이야.”



●처음엔 1년에 돈 한 푼 못 벌던 시절도 있었다는데.



 “그런 고생은 아무것도 아냐. 오히려 나를 좀 더 강하게 만들어 줬지. 치열함은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고교 시절 서울에서 부친을 따라 아프리카로 갔다. 서부의 부르키나파소란 나라에서 평생 의료봉사를 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림자도 못 따라가지. 그분은 진정한 영혼의 소유자야.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남을 위해서 살았고. 양복 두 벌에 시계 하나, 그리고 청진기 두 개가 그 사람이 평생 소유했던 것인데….”



●프랑스에선 노벨 문학상(2008년) 수상자인 르클레지오와 묘한 인연을 쌓았다는데.



 “76년 니스 미대 다닐 때였지. 버스 안에서 만난 한 남자가 한자를 가르쳐 달라고 했어. 나는 석 달간 가정교사 노릇을 했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르 클레지오더라고. 그가 이화여대에서 강의할 때 다시 찾아가 만났어. 지금은 그와 함께 책 내는 작업을 하고 있고.”



●원래 김중만씨는 스타들 사진으로도 유명하다.



 “고마운 일이지. 그때는 상업 사진가로서 나한테 주어지는 촬영 계약을 기쁜 마음으로 한 거고. 이후엔 그런 생각을 철저히 배제하면서 일을 했지.”



●최근에도 아이돌 그룹 빅뱅의 화보 촬영을 했는데.



 “오랜만이었지. ‘나, 미안한데 너희들 이름도 다 모른다’고 했어. 하지만 ‘대한민국 대표하는 그룹 중 하나라니 보고 싶었다’고 하며 작업했지, 하하. 즐겁더라고.”



●사진가를 꿈꾸는 젊은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사진이 대세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 안에 무한한 콘텐트가 있어. 점점 소멸돼 가는 우리들을 기록할 수 있어서 스스로 되돌아 볼 수 있지. 물론 굉장히 힘든 작업이야. 그 무거운 장비를 다 짊어지고 다니니. 사진은 세상의 어둠과 밝음, 아름다움, 슬픔을 설명하지 않고 진실하게 빨리 전달할 수 있어. 사진을 놓고 이미 ‘무엇이다’ 설명하면 생명을 잃는 거지.”





김점선(왼쪽 사진)



1946년 개성 출생. 이화여대(시청각교육학)와 홍익대 대학원(서양화)을 나왔다. 72년 1회 앙데팡당전에서 백남준·이우환 심사로 파리 비엔날레 출품 후보에 선정돼 등단했다. 87~88년 연속 평론가협회의 미술 부문 최우수 예술가로 뽑혔다. 방송사 문화 프로그램 진행자로도 얼굴을 알렸다. 순수한 화풍으로 말·꽃·오리 등을 많이 그렸다. 난소암으로 투병하다 2009년 세상을 떠났다.



김중만



1954년 철원 출생. 71년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로 갔다. 이듬해 프랑스로 떠나 니스의 국립 응용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사진에 매료돼 평생 직업으로 택한다. 77년 프랑스 아를 국제 사진전에서 젊은 작가상을 받았다. 79년 귀국해 바자·보그 등 패션지와 작업했고, 이후 스타·패션 사진을 많이 찍었다. 2000년 1월 한국 작가 최초로 아프리카 사진집 『동물왕국』을 냈다.





j칵테일 >> 프로의 습관, 습관이 만들어 낸 프로



김중만씨는 얼마 전 머리를 짧게 깎았다. 심벌 같았던 ‘레게 머리’를 쳐낸 것이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마음의 평온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 모습이 아직은 어색한지, 캄보디아 현지에선 그 무더위에도 계속 모자를 쓰고 다녔다. 이에 더해 치마처럼 내려오는 하의와 검은색 후드 티는 영락없는 마법사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튀는 외관이 그의 전부는 아니었다. 김중만씨는 독특한 습관이 있었다. 아침에 ‘김점선 미술학교’로 출발하기 전, 10분 정도 짬이 났다. 숙소 앞마당에 전시된 클래식 자동차를 본 김중만씨는 연방 셔터를 눌러댔다. 출발 시각도 잊은 듯했다. 개교식을 마친 뒤 인터뷰를 하기 전 버스를 기다릴 때도 그랬다. 호텔 지붕을 한참 찍더니, 옆으로 옮겨가선 저 멀리까지 가버렸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인터뷰하려는 기자 마음은 조급해졌다. 김중만씨는 일정 내내 그랬다. 틈만 나면 카메라를 들었고, 하여간 계속 찍었다. 그런 습관이 ‘프로 김중만’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인터뷰 중 김중만씨는 갑자기 제자에게 “내 사진 좀 찍으라”고 주문했다. “j독자들에게 직접 사진을 선물하고 싶다”는 거였다. 촬영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호텔에 뒀던 옷이며 모자까지 다시 들고 오게 시켰다. “자, 심호흡 하고, 배에 힘주고…. 이제 찍자.” 촬영이 끝났다. 귀국 뒤 며칠 지나 기자에게 연락이 왔다. “다른 사진을 보내겠다”고. 많은 일로 바쁜 와중에 스튜디오에서 다시 사진을 찍었단다. 현지에서 너무 급하게 찍은 것 같다며. 대충 넘어가지 않는 사람. 김중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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