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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일상, 나그네에겐 공포

건물 흔들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앗! 이게 지진이라는 거구나’.
옆으로 몇 번 흔들하더니 다시 아래위로 그만큼 출렁거렸다. 다행히 금세 멈췄다. 놀라서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오전 3시 반을 지날 무렵이었다. 한국의 산사였다면 새벽예불 준비로 부산할 시간이다. 비로소 일본 센다이(仙臺)에 온 것이 실감났다. 제대로 신고식을 치른 셈이다. 올 3월 대지진 이후로 현재까지 여진이 계속된다더니 사실이었구나. 여기에 사는 이들은 일상적인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그네에겐 놀라움이었다. 다시 잠을 청했다. 아침 뉴스는 ‘규모 4’라고 보도했다. 조계종 방문단 일행이 동쪽으로 온 까닭은 지진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그러기에 지진을 직접 만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믿음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도호쿠 지방으로 출발하기 전 요코하마에 들러 사단법인 산티국제자원봉사협회(SVA)에 구호금을 전달하며 “한국 국민은 불의의 참사를 당한 일본 국민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여긴다”는 인사말씀을 통해 이웃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라는 안타까운 심경을 피력했다. 이튿날 센다이로 장소를 옮겨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함께 일본 대지진 피해자를 위한 합동위령제를 올렸다. 정법안장(正法眼藏)이란 저서로 동아시아 사상사를 빛낸 도오겐(道元·1200~1253) 선사를 따르는 조동종은 1992년 겨울, 과거의 일본 압정에 희생당한 아시아인들에게 깊이 사죄하며 권력자의 입장에서 해외 전도에 임한 잘못을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참회문을 발표하는 용기를 보여 준 바 있다.

인근의 동북조선초중급학교를 찾았다. 한때는 수백 명이 다니던 큰 학교였다고 하나 지금은 수십 명의 학생뿐이었다. 교장선생님은 무너진 학사를 안내하다 말고 운동장에 쪼그리고 앉더니 그때 규모 9의 지진은 이렇게 앉아 있을 수도 없을 만큼 흔들렸다고 당시 상황을 우리들에게 재연해 보였다. 이들은 비인가 학교라서 일본 정부의 복구비용을 제대로 지원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남과 북의 틈새에서 소외된 곳은 어쩔 수 없이 종교인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정성껏 준비해 온 선물과 복구기금을 전달했다. 학교 당국은 “민족적 공동선과 동포적 인류애를 보여 주는 일”이라고 화답했다. 이즈음은 한류의 영향으로 흰 저고리 검정 치마 교복을 입고 다녀도 예전 같은 ‘이지메’는 없어졌다는 후일담도 덤으로 들을 수 있었다.

곧바로 지진과 쓰나미 피해가 가장 심했다는 구역을 들렀다. 4개월간의 복구작업에도 논으로 들어간 자동차, 밭으로 올라온 고깃배, 집안으로 쳐들어와 드러누운 고목이 당시 실상을 적나라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2층 목조주택으로 가득한 평화로운 농어촌이 아무것도 없는 휑한 평지로 바뀌었다. 마을에 가려 바다가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제대로 보인다며 해안을 가리키는 손가락 방향을 쳐다보는 일행 역시 만감이 교차했다. 신사(神社) 자리였다는 평평한 언덕 위에 서서 내려다보니 그 피해 면적의 광대함이 제대로 실감났다. 물론 마을 안에 있던 사찰도 예외일 순 없었다. 빠져나오는 길에 저온창고 벽에 쓰여 있는 ‘미야기(宮城)현의 품질 좋은 쌀’ 광고문구가 헛헛하게 눈에 비쳤다.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외신은 또 도호쿠 지방의 여진 소식을 자막으로 전했다. 700여 년 전 두 차례의 큰 해일을 이겨 내고 오늘까지 그 자리를 당당하게 지키고 있는 ‘카마쿠라(鎌倉) 대불(大佛)’이 일본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연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원철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한문 경전 연구 및 번역 작업 그리고 강의를 통해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하고 있다. 대중적인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의 소통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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