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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주권의 수호자, 1878년 두모진해관이 효시

대한민국은 교역량 세계 9위를 자랑하는 무역대국이다. 지난해 교역 규모는 8916억 달러였다. 그중 수출이 4664억 달러, 수입은 4252억 달러다. 대한민국의 나라별 교역액은 중국·일본·미국·사우디아라비아·싱가포르 순이며 관세 수입은 약 51조원에 이른다. 총국세 수입(172조원)의 30% 수준이다. 외국 상품을 들여올 때 부과·징수하는 조세가 관세다. 수출세·수입세·통과세가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수입세만 있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 <66> 서울본부세관

서울 강남 언주로 언덕에 있는 서울본부세관은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이 자리에 함께 있었던 관세청은 1998년 대전으로 옮겨 갔다. 서울세관 교차로는 여전히 ‘관세청 사거리’로 불린다. 서울본부세관은 관세청 산하 전국 30개 세관 가운데 하나지만 관할 면적과 실적 면에서 관세청 전체의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9·11 테러 이후 시행되고 있는 ‘수출입안전관리 우수공인업체(AEO)’ 제도에 따라 지금까지 100개 업체가 인증받았는데 65개 업체를 서울세관에서 인증했다. 서울세관은 관세청의 간판이라고 할 수 있다.

푸른 방패와 양팔 저울 그리고 1878. 관세청의 엠블럼이다. 방패는 차단과 보호를 위한 병장기이고, 저울은 상거래에 필요한 도구다. 방패로 국가 재정과 국민경제를 보호하고 국민생활 위해요소를 차단한다. 밀수품과 불량한 수입 먹을거리 반입을 차단해 국민의 건강한 식탁을 지킨다. 저울로는 국제교역을 촉진한다. 숫자 1878은 부산 두모진해관(海關:세관의 중국식 이름)에서 국제화물에 처음으로 관세를 물리기 시작한 해를 뜻한다.

1876년 일본과 무역규칙을 체결할 무렵 조선은 관세주권 개념조차 없었다. 당시 조선은 국제무역 관행조차 알지 못해 7년 동안이나 무관세시대였다. 조선 정부가 부산 두모진에 해관을 설치하고 일본인을 상대로 상품을 사고파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세금을 거두기 시작한 건 개항 후 2년이 지나서였다. 하지만 관세 징수로 조선인 상인의 왕래가 끊어지자 일본인 상인들이 집단으로 항의하고 저항한다. 결국 3개월 만에 두모진해관은 폐쇄되고 만다.

1885년 인천해관 화재에서 살아남은 『제물포해관 문서철』(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94호). 서울본부세관 1층 관세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신동연 기자
1882년 조선 정부는 미국과 통상조약, 청나라와 무역장정을 체결하면서 관세주권을 보장받는다. 이에 따라 일본만 무관세 지역으로 둘 명분이 사라진다. 세관 설치·운영 경험이 없던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언을 구한다. 1882년 겨울,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조선에 입국해 세관 창설을 도맡게 된 계기다. 청나라에서 목인덕(穆麟德)으로 불린 그는 고종으로부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 벼슬을 받는다. 오늘날로 치면 외교통상부 차관에 해당한다. 그는 1885년 9월 해임될 때까지 약 3년간 조선의 세관 업무를 총괄했다. 한국인 최초의 세관원 남궁억(南宮檍·1863~1939)은 1883년 서울 재동에 세운 1년제 관립영어학교 동문학(同文學) 제1회 졸업생인데 묄렌도르프 밑에서 2년간 근무한다. 조선 정부기관인 세관의 운영 주체는 묄렌도르프를 중심으로 한 외국인이 대부분이었다. 중국인 통역관 오례당(吳禮堂·1843~1912)과 미국인 의료선교사 알렌이 대표적이다.

오례당은 매우 드라마틱한 인물이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미국 등 서방세계에 파견된 외교사절단 보빙사(報聘使) 일원으로 활약했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그는 유럽 일대를 돌며 국제적 안목을 익힌다. 그러다 37세 때, 20살 연하의 스페인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다. 묄렌도르프의 초청으로 조선에 건너와 세관원 생활을 하던 그는 인천시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어제 제물포에 있는 해관(海關) 청사가 불타 버렸다.” 1885년 7월 19일자 알렌의 일기에 적힌 구절이다. 해관 주치의 알렌은 그때 제중원 의사가 돼 있었다. 제물포해관 문서철(Despatches from Chemulpo)이 발굴, 공개되기 전까지 알렌의 일기 내용이 정설로 받아들여졌었다.

“묄렌도르프 각하, 인천해관이 완전 소실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어 정말 유감입니다. 화재로 인해 금고 안의 내용물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타버렸습니다. 화재는 밤 12시10분경 처음 발견되었습니다. …현재까지 조사한 바로는 화재는 아마도 제 사무실 근처, 오례당의 사무실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이며….” 7월 16일자 보고서 내용이다. 이 보고서에는 보빙사로 미국에 간 우리 사절단이 요청한 가축들이 인천항을 통해 수입된 사실도 들어 있다. 서울에서 온 관리가 암소 1마리, 황소 2마리, 조랑말 3마리를 면세로 통관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제물포해관 문서철은 2009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94호로 지정받았다. 현재 서울본부세관 1층 관세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서울본부세관 관세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에 소장돼 있는 제물포해관 문서철에 주목한 까닭은 문화유산을 제대로 발굴하고 보존한 과정이 특별해서다. 그간 개발과 경제논리에 눈이 어두워 유서 깊은 건축물을 헐어 버리거나 기록물을 없애 버리는 예가 많았다. 인천개항장의 초기 세관 건물들과 우리나라의 고도성장시대 30여 년을 함께 해 왔던 항동의 3층 청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개항장에 있던 초기 세관 터에는 호텔이 들어섰고 항동 보세창고 옆 옛 청사는 2년 전에 헐려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표석 하나 없는 현장들을 보면서 충격을 넘어 허탈감마저 느꼈다.

더 큰 충격은 부산세관 옛 청사가 헐려 버린 일이다. 현재 부산세관 청사 서쪽 육교 부근에 있던 옛 청사는 항도 부산의 상징적인 건물이었다. 일본인 이시다(石田)의 설계로 1911년 준공한 르네상스 양식 건물인데 붉은 벽돌과 화강암을 사용했고 2층 건물 위에 3∼4층을 차지했던 종탑이 미려했다. 붉은 벽돌은 러시아에서 한 개씩 종이에 싸서 운반해 왔다고 한다. 1973년 부산지방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됐다. 그런데 부산시의 도시근대화 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공사로 1979년 6월 2일 철거해 버리고 만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을 다른 곳에 옮겨 놓지도 않고 스스로 그 흔적을 지워 버린 것이다. 부산세관 청사 뜰에는 종탑부만 옮겨 보존하고 있다.

제물포해관 문서철을 조심스럽게 넘겨 본다. 1980년 관세청에서 박물관을 건립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고(故) 진기홍씨가 기증했던 기록물이다. 이후 20여 년간 낡아 바스러져 가는 문서철에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우연히 박물관을 방문한 해양학자 한상복 박사가 비범한 문서임을 밝혀낸다.

“서울세관은 2006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과 이태진 교수에게 이 문서의 존재를 알리면서 비로소 그 가치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서울세관이 학예사를 고용해 수장고와 전시실의 유물 목록을 만들고 있던 과정에서 저는 호기심이 발동해 문서철을 넘겨 보게 됐어요. 곧바로 묘한 매력에 빠졌지요. ‘문화세관 프로젝트’가 발족됐고 책의 원형 복원과 번역 및 영인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죠. 2007년, 전국 주요 국공립도서관 및 한국학연구원에 복원한 원본과 거의 똑같게 제작한 영인본과 번역본을 배포했습니다. 이후 학계에 알려져 근대사나 개항사 연구자들이 인용하는 자료가 됐지요.” 서울세관 김성수(47) 주사는 복원한 책자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김 주사는 문서철 첫 페이지 장서인을 보고 고서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어렵사리 기증자를 찾아냈다. 하지만 90세가 넘은 고령의 기증자는 전혀 기억을 못 했다고 한다. 인천해관 화재 당시 건져 낸 경위는 물론 그 이후 100년간 보존돼 온 경위 또한 그렇게 묻혔다.

우리는 흔히 세관을 관세 징수와 밀수단속기관으로 본다. 세계무역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일반특혜 관세 적용에서 진일보한 자유무역협정(FTA)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에 따라 국제 관세행정의 패러다임도 변했다. 세관의 역할이 ‘세수 확보·밀수방지 대물 관리’에서 ‘교역 안전·공정무역·대기업 관리’로 전환되는 추세라고 한다.

“중국 모처에 우리 개화기 20년치의 공문서가 보존돼 있다는 믿을 만한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해관에서 근무했던 외국인 세관 직원들이 보고한 문서들이지요. 기회가 닿으면 앞으로 한·중 관세 당국끼리 원만한 협의를 이끌어 내 그 문서들을 우리 학계에 소개할 생각입니다. 근대사와 개항사, 우리 세관 역사 연구자료로 활용케 하고 싶습니다.” 천홍욱(51) 서울세관장의 말이다.

서울본부세관 관세박물관은 교육적 가치가 크다. 헐어 버린 문화재 건물의 벽돌 한 장과 제물포해관 문서철은 우리가 무엇을 지켜내고 무엇을 나침반으로 삼아야 할지를 말해 준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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