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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수필 사랑, 수필을 문학으로 끌어올려

조경희 전 장관 [중앙포토]
이따금 ‘신변잡기도 문학이냐’는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로서 확고한 위치를 구축할 수 있게 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신문 잡지의 현상문예나, 문예지의 추천제도에서 수필부문은 배제돼 있었다. 수필은 잡문이라는 일반적 인식 탓이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19> 문단의 여걸, 조경희

수필의 위상을 문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한국문인협회가 출범하면서부터 그 산하의 수필분과위원회를 이끌어온 조경희였다. 71년 조경희가 한국수필가협회를 창설하고 최초의 수필 전문지인 ‘수필문예’를 창간하면서 수필에 대한 일반적 인식도 달라졌고 문단에서도 수필을 독립된 장르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조경희는 창립 이후 200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5년간 줄곧 수필가협회 회장직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그가 평생 수필에 기울여 온 남다른 애정은 짐작할 만하다.

조경희가 이처럼 수필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오랜 언론계 경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로 작용했다. 한국일보 주필을 지낸 오종식이 수필가협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되고 학계와 언론계의 몇몇 주요 인사들이 조경희 회장과 함께 협회 회장단을 이끌었던 것도 수필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1918년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난 조경희는 39년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한 뒤 곧바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언론계 생활을 시작하면서 80년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마지막으로 정년 퇴직할 때까지 41년을 언론계에 몸담았다. 그동안 옮겨 다닌 언론사만도 모두 8군데에 이른다.

그가 수필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것이 37세 때인 55년 첫 수필집 ‘우화’를 펴내면서부터였으니 따지고 보면 수필가로서의 경력보다는 언론인으로서의 경력이 훨씬 길었던 셈이다. 어쨌거나 조경희는 수필가와 언론인의 경력을 바탕으로 88년 노태우 정부 시절의 정무2장관을 비롯해 여러 문화예술단체와 여성단체의 수장 등 그가 일평생 거쳤던 다양하고 다채로운 이력을 쌓을 수 있었다. 신문사 재직 중에도 그처럼 여러 가지 일을 겸할 수 있었다는 것이 얼핏 이해되지 않는 측면도 있지만 그 또한 조경희의 능력이자 수완이었다.

활동적이며 뚝심도 있는 데다가 결코 여성답다고 할 수 없는 외모 따위로 해서 조경희는 여성이면서도 남성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곧잘 들었다. 심지어 가깝게 지내던 남성 문인들 가운데는 그를 ‘형’ 혹은 ‘형님’으로 호칭하는 이들도 있었고 조경희도 이런 호칭을 고깝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성 문인들 앞에서는 늘 기발한 화제로 분위기를 돋우기 일쑤였고, 남성 문인들 앞에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야한 농담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여걸’로 불리면서 그렇게 평생 활기차고 역동적인 삶을 살았던 그도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군목(軍牧)을 지낸 일이 있고 남편 홍태식은 해군 정보부대에 몸담고 있었다.

미처 피란을 가지 못했던 조경희의 집에 북한군이 들이닥쳐 수색하던 중 그들의 군복이 발견된 것이 화근이었다. 조경희는 서대문형무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한 달 가까이 갇혀 있던 조경희는 저들의 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여성동맹에 가입한다는 도장을 찍은 다음에야 풀려난다. 한데 서울이 수복된 후에는 여성동맹에 가입한 것이 문제가 되어 다시 수감되고 부역 혐의로 구속된 노천명과 함께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언도 받기에 이른다. 사형 집행이 미뤄진 채 1·4후퇴 때 죄수복을 입고 부산까지 끌려간 조경희는 남편과 모윤숙·조연현 등 문인들, 그리고 언론인들이 힘을 모아 구명운동을 벌인 끝에 가까스로 살아남게 되었다.

조경희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한다’는 뚝심으로 여러 단체의 수장 자리에 집착했던 것도 그런 고비를 겪은 사람 나름의 오기 같은 것이 작용했을 법하다. 84년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예총) 회장에 도전했을 때가 좋은 예다. 그가 영화배우 출신인 신영균 현역 회장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을 때 주변의 많은 사람이 만류했다. 심지어 투표권을 가진 문인협회의 대의원들조차 승산이 없다며 포기를 종용했다. 신영균이 재정난을 겪고 있던 문인협회를 돕겠다는 사전의 밀약이 있기도 했지만 예총 내에서 신영균이 워낙 오랫동안 굳건한 아성을 구축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경희는 뚝심으로 밀어붙였고 결과는 조경희의 완승이었다. 조경희는 재선에도 성공한 뒤 정무2장관에 발탁됐다.

그가 거쳐 간 단체의 수장 자리만 10여 개에 이르니 아마도 조경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다양한 경력을 지닌 여성 문인으로 꼽힐 것이다. 한데 그가 그런 경력을 거치는 과정 중에는 부각되는 한 사람이 있다. 남편 홍태식이다. 홍태식은 아내가 어느 자리를 맡았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보필했다. 그래서 조경희를 아는 사람 쳐놓고 홍태식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경희의 자리 곁에는 항상 홍태식의 자리가 따로 마련돼야 했고, 조경희를 초대하기 위해서는 홍태식을 함께 초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가 몸이 불편한 채 협회 사무실에 출근하면 아내를 간이침대에 눕게 하고 회장 업무를 대신 보는가 하면 아내의 장관 재임 때는 함께 장관 집무실로 출퇴근하기도 했다. 군에서 전역한 뒤 일정한 직업을 가지지 못한 데다가 부부에게 자식이 없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홍태식의 전처 소생인 딸이 일찍이 코미디언 배삼룡과 혼인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한동안 ‘조경희는 배삼룡의 장모’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홍태식이 그처럼 ‘외조’의 공을 쌓은 것은 한때 ‘여자 문제’를 일으켜 몇 해 동안 별거한 뒤 재결합한 터여서 부부간의 돈독한 애정을 과시하려는 뜻이 더 강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조경희는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예술의전당 이사장, 여성개발원 이사장, 서울예술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비교적 장수하여 2005년 8월 5일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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