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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수천년 싸워온 적, 질기디 질긴 그 이름은 ‘암’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
싯다르타 무케르지 지음
이한음 옮김, 까치
584쪽, 2만5000원


이것은 전쟁사, 정체 모를 괴물에 대한 수기(手記), 거대한 백과사전이자 심연을 마주한 추리물이다. 고통의 해부학, 희망의 고백록이다. 메스를 든 외과의사의 시선으로 침착하게 헤집은 수천 년 된 적(敵)의 전기(傳記)다. 적의 이름은 암이다.




1890년대 미국 외과의사 윌리엄 스튜어트 홀스테드는 유방암을 뿌리뽑기 위한 시술법으로 근치 유방절제술을 창안했다. 이 절제술의 효과가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지기까지 100년이 걸렸고, 이 기간 동안 50만 명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외모를 훼손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도서출판 까치 제공]

기원전 2500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스미스 파피루스(1862년 에드윈 스미스가 발견한 이집트 파피루스 사본)를 보자. 이집트 의사 임호텝은 손의 골절, 피부 종기, 산산조각 난 머리뼈 등 48가지 외과 사례를 기록하면서 45번째로 ‘유방에서 튀어나온 덩어리’를 언급했다. 48가지 사례 대부분에 증상을 완화시키는 비법이 곁들여져 있지만 45번째 항목엔 이렇게 적혀 있다. ‘치료법 없음.’

 암은 그렇게 인류사에 등장했다. 기괴한 첫 대면에서부터 인간은 졌다. 그러나 패배의 수치(羞恥)는 깊지 않았다. 암의 존재가 미미했기 때문이다. 등장 때마다 전세계를 초토화시킨 전염병들(티푸스·천연두·결핵 등)에 비해 암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암은 개인적인 사고처럼 여겨졌다.

 암이 ‘만병의 황제’로 등극한 것은 현대에 와서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로 인간 수명이 연장됐다. 암은 나이 들수록 발병률이 높다. 고대인은 암에 걸릴 정도로 오래 살지 못했다. 전자파 범람, 화학물질 노출 등 현대적 삶의 방식도 유병률과 인과관계가 있을 것이다. 예전에 비해 조기에 암을 찾아내고 사망원인임을 밝혀내는 능력도 암을 가시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제 암은 가장 흔한 질병이다. 2010년 전 세계에서 700만 명 이상이 암으로 죽고, 세계인의 15%가 암 때문에 사망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암이 흔해졌다고 해서 환자 개인이 짊어지는 고통의 무게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암과 관련된 종양학(oncology)의 어원인 온코스(onkos)는 덩어리나 짐 또는 부담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암은 몸이 짊어진 무거운 부담으로 인식됐다. 원인도 치료법도 모르는 죽음의 전조(前兆)는 수십 세기 동안 개인을 괴롭혔다. 역사에 기록된 희귀한 환자들은 하나하나가 이 정체불명의 괴물에 맞닥뜨린 전사였고, 고통의 내레이터였다. 이 책은 그 역사에 바치는 현대 의사의 헌사다.

 종양학자이자 의사인 싯다르타 무케르지는 암이 왜 생겨나고 어떻게 치료될 수 있는지 쓰고 있지 않다. 암에 관한 모든 것을 적은 이 책에 ‘암을 이기는 법’ 따위란 없다. 저자는 암과 암환자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가졌던 의문, ‘과연 암은 우리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존재인가’에 답하고 있을 뿐이다. 그에 따르면 이 책은 “한 질병의 연대기이자 전기”(9쪽 ‘저자의 말’)다.

 아마도 이 전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암이란 대상의 사회정치적 ‘커밍아웃’ 과정을 촘촘하게 묘사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현대 화학요법의 아버지 시드니 파버와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미 사교계의 여왕 메리 래스커의 일생을 통해 “암과 싸우는 운동이 정치 운동과 흡사하다”(118쪽)는 통찰을 보여준다.

 소아암 연구기금(일명 지미 기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상징, 마스코트, 이미지, 표어 등 선전 전략이 주효했다. 1971년 뉴욕 타임스가 암 관련 기사를 450건 쏟아낼 무렵, 구(舊) 소련의 암 병원을 호되게 다룬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암 병동』과 24세 여성이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영화 ‘러브 스토리’가 발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재선을 앞둔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끝이 보이지 않는 베트남 전쟁을 대신해 암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71년 암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소설가 수전 손택의 명저 『은유로서의 질병』에 깊이 감화된 듯한 유려한 글쓰기는 두터운 책장을 쉽사리 넘기게 한다. 이 광범위한 암의 실록에서 무엇을 취사 선택해 읽을 것인가는 독자의 몫이다. 개인적으로는 얼마 전 “어머니가 간암 판정을 받았다”고 털어놓은 친구를 떠올렸다. 내가 위로의 말을 다 마치기도 전 친구는 불가해한 심경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자식으로서 안타까움만큼 충격이었던 것은 어떠한 수단·방법을 통해서라도 더 살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억척스러움이다. 내가 여태껏 봤던 모습과 전혀 다른.”

 이제 친구에게 이 책의 마지막에 소개된 환자 저메인 번을 얘기해주고 싶다. 번은 1999년 전신으로 전이된 암 선고를 받은 뒤 신약 임상시험에 전투적으로 참여하며 ‘시한부 인생’을 조금씩 늘렸다. 2005년까지 6년 간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남동생과 더욱 가까워졌으며, 10대였던 딸이 대학2년생이 되는 동안 둘도 없는 절친(친한 친구)으로 지냈다. 그녀의 투쟁은 인류가 암과 벌여온 전쟁과 닮았다. “이 질병을 따라 잡으려면 계속 전략을 창안하고 재창안하고 배우고 다시 배워야 한다.”(519쪽)

  “암은 거울의 집처럼 무한히 자기 자신을 비춘다”(443쪽). 암을 통해 인간을 해부한 이 책은 지난해 뉴욕 타임스 북리뷰 논픽션 부문 ‘올해의 책’에 선정됐고, 올 퓰리처상 일반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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