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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용서받지 못한 자







이철호
논설위원




강화도 해병 부대의 총기 난사를 보며 낡은 신문 속의 ‘최영오 일병 사건’을 떠올렸다. 1962년 7월 8일 오전 8시의 일이다. 서울대 문리대 4학년을 다니다 입대한 최 일병은 고참 2명의 등을 향해 M1 소총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여자친구가 보내온 12통의 사랑 편지를 같은 내무반의 병장과 상병이 뜯어보고 희롱하자 대들었다. 고참들에게 거꾸로 흠씬 얻어맞은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한 채 총을 쏘고 자살을 기도했다. 군사법정에 끌려온 최 일병은 “두 사람을 살해한 순간 나 또한 죽은 지 이미 오래다. 다만 아무리 군대라 해도 인간 이하의 노리개처럼 갖고 노는 잔인함을 향해 총을 쏘았을 뿐”이라고 울부짖었다.



 수많은 서울대 학생들과 문인(文人)들이 구명운동에 나섰으나 소용없었다. 이듬해 3월 19일, 그는 서울 수색의 군 사격장에서 총살당했다. “나의 죽음으로 비인간적인 군이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군대로 거듭나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남편과 사별한 뒤 20년간 혼자 그를 뒷바라지한 모친(당시 61세)이 한강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평소 자주 빨래하던 마포 강변에 가지런히 놓인 고무신 안에는 “높으신 선생님들, 내가 영오 대신 가겠으니 제발 내 아들은 살려주십시오”라고 적힌 유서가 들어 있었다. 온 사회가 눈시울을 붉혔다.



 통계에 따르면 군부대 사망자는 80년대 중반 매년 600명 선을 기록하다 지금은 4분의 1 이하인 130명 정도로 떨어졌다. 군 장비와 무기가 개선되고 부대 환경이 좋아진 덕분이다. 하지만 전체 사망자 가운데 자살이나 군기사고 희생자는 연평균 70명 선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군 당국은 자꾸 가정환경이나 개인 문제로 돌리지만 납득하기 어렵다. 아무리 군대가 좋아졌다지만, 세상은 더 좋아졌기 때문이다.



 사치일지 몰라도 이스라엘 군대와 비교해 보자. 이스라엘은 고교 졸업 후 3년간 군대에서 의무복무를 한다. 소모적일 수 있는 이 기간을 고급 인력 양성에 힘을 쏟아 이스라엘은 세계 최강의 벤처 대국으로 우뚝 섰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부끄럽다. 병역 기피를 위해 원정출산 바람이 거세고, 인기 연예인은 멀쩡한 생니까지 뽑는 세상이다. 그나마 입대해도 기수열외(期數列外·왕따), 잠깨스(잠 안 재우는 가혹행위), 앞뚫(앞만 보게 하는 괴롭힘) 같은 잘못된 악습이 반복된다. 그 속에서 젊은이들이 신음하고, 우리 사회 전체가 고통을 받고 있다.



 얼마 전 2000만원의 저예산으로 만든 ‘용서받지 못한 자’가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다.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으로 1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에서 선임병의 폭력에 저항하던 주인공에게 배우 하정우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너가 틀린 건 아닌데, 그러면 너만 힘들어져.” 관객들은 “맞아, 군대는 저렇지”라며 몰입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군 내부의 비뚤어진 힘과 권위가 어떻게 순진하고 착한 주인공을 폭력의 가해자로 변질시켜 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런 영화가 폭넓은 공감을 얻는 우리의 현실이, 뒤집어 보면 용서받지 못할 서글픈 자화상이다.



 강화도 해병부대 사건의 진상은 한창 수사가 진행 중이다. 아마 그 뒤엔 군 당국의 요란한 후속 대책들이 쏟아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비극이 사라지리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최영오 일병 사건 직후 소설가 강신재가 한 신문에 쓴 글을 다시 뒤적이면서 문득 우리 사회가 지난 49년간 과연 한 발짝이라도 진보했는지조차 의심이 들었다. “최 일병과 그 어머니 이야기는 너무나 참혹하고 애잔해 글을 쓰기도 고통스럽다. 가슴이 아파 신문을 읽기 힘들고, 정직하게 말하면 그만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최 일병의 사형은 문제의 결말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의 출발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번 사건이 우리 모두가 막을 수 없는 비극이었는가? …” 한 세대를 건너뛰어 오늘, 우리는 똑같은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든 비극이다.



이철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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