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점점 커지는 유리창,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창 밖과 창 안’

요즘처럼 언제 폭우가 쏟아질지 모르는 날씨에는 라디오 녹음방송 멘트를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라디오 청취자는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바로 그 시간에 이야기해주는 그 말이, 실시간으로 자신의 귀에 들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방송을 듣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잠 못 드는 자신을 위해 속삭여주는 듯한 감성적인 말들이, 이틀 전 훤한 대낮에 녹음되었다고 생각해보라. 시쳇말로 정말 ‘깬다’. 그러니 언제 폭우 피해가 생길지 알 수 없는 시기에는, 달착지근한 비 노래 같은 것을 절대로 녹음해 놓아서는 안 된다. 특히 이 노래가 그렇다.

“님이 오시나보다 밤비 내리는 소리 / 님 발자욱 소리 밤비 내리는 소리 / 님이 가시나보다 밤비 그치는 소리 / 님 발자욱 소리 밤비 그치는 소리 / 내려라 밤비야 내 님 오시게 내려라 / 주룩주룩 끝없이 내려라” (이장희의 ‘비의 나그네’, 1972, 이장희작사·작곡)
윤형주·이장희(사진) 등도 세시봉 콘서트에 나와, 어느 해 홍수가 난 때에 방송에서 이 노래를 틀었다가 혼쭐이 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물난리가 났는데 “내려라 밤비야” “끝없이 내려라”라니!

그런데 이 노래만이 아니다. 1970년대 포크 시대에 들어오면 비는 수시로 등장한다. ‘렛 잇 레인(Let it rain)’ ‘레인(rain)’ 같은 외국곡에다, 송창식의 ‘비와 나’ ‘창밖에는 비 오고요’, 이장희 ‘애인’ ‘그건 너’, 양희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김세환의 ‘비’에 이르기까지 비가 없으면 거의 노래가 안 될 지경이다.

흥미로운 것은 비에 대한 태도다. ‘애인’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처럼 이별의 슬픈 장면에서 쏟아지는 비는 60년대 대중가요에서도 익숙한 풍경이다. 하지만 “비가 오면 빗속을 거닐었고 눈이 좋아 눈길을 걸었소”(‘우리의 이야기들’), “우리 처음 만난 날 비가 몹시 내렸지 쏟아지는 빗속을 둘이 마냥 걸었네”(‘비’)처럼, 그저 비 맞기를 즐기는 감수성은 정말 여태껏 나타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었다. 아마 이들은 분명 ‘그건 너’의 주인공처럼 “비가 오는 종로거리를 우산도 안 받고 걸었”을 것이다. 왜 이 나이 때는 꼭 이런 짓을 해보고 싶어지는 걸까. 나이가 들고 보니, 정말 이 짓은 끓는 피를 주체할 수 없는 젊은 나이 때나 해볼 수 있는 짓이란 생각이 든다.

비를 애인과 등치시킬 정도로 비를 사랑하는 노래도 꽤 있다. 위에서 소개한 ‘비의 나그네’에서는 비 오는 소리를 애인이 오는 소리라고 한다. 송창식이 자작곡 가수(싱어송라이터)로 본격적인 출발을 하는 노래인 ‘창밖에는 비 오고요’에서도 “창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그대의 귀여운 얼굴이 날 보고 있네요”라고 노래한다(지난해 토크쇼에서, 이 노래가 윤여정 생일에 송창식이 “여정이 귀여운 얼굴이 날 보고 있네요”라고 불러 바쳤다는 이야기가 공개되기도 했다). 왜 하필이면 ‘그녀’는 비와 함께 나타나는 것일까. 그녀도 비를 좋아하는 걸까. 아니, 아마 비가 오는 밤에 잠이 오지 않는 주인공이, 골똘히 그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을 듯하다. 아마 그는 창밖에 그녀가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비를 사랑하는 감수성이야말로 청년문화 시대의 새로운 것이었다. 지난주에 이야기했듯, 바깥에서 비를 맞으며 헤매거나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던 50년대까지만 해도 대중가요 속의 비는, 늘 춥고 고통스러운 ‘궂은 비’였다. 그에 비해 비를 사랑하는 청년문화 시대의 감수성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의 특성이다. 게다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빗소리를 듣고 있다니, 그 역시 낮에 몸을 움직여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의 특성이다. 낮에 일을 하지 않으니 밤에 자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청년문화가 시작된 시대는 바로 이러한 대도시 속 젊은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대였다. 낮에 열심히 육체노동 하며 험하게 살아왔던 부모 세대들과 달리, 이들은 실내에서 창문을 통해 비를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을 살게 된 것이다. 게다가 훤한 대낮이 어른들의 질서가 관철되는 현실의 공간이라면, 밤은 오로지 자신을 대면하면서 상상과 사유를 펼쳐볼 수 있는 공간이다. 거기에 차분하게 비가 내리고 유리창에 빗방울 부딪는 소리까지 들리니 이 얼마나 좋은가.
유리를 통해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지식청년들의 이야기는 이미 50년대 말 최인훈의 『그레이구락부 전말기』에서 등장했거니와, 70년대에는 그것이 대중가요에 숱하게 등장할 정도로 대중화되었다. 아마 그 절정은 80년대 말의 이 노래가 아닐까.

“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 / 그대 숨소리 살아있는 듯 느껴지면 / 깨끗한 붓 하나를 숨기듯 지니고 나와 / 거리에 투명하게 색칠을 하지 / 음악이 흐르는 그 카페엔 초코렛색 물감으로 / 빗방울 그려진 그 가로등불 아래 보라색 물감으로 / 세상사람 모두 다 도화지 속에 그려진 풍경처럼 행복하면 좋겠네 / 욕심 많은 사람들 얼굴 찌푸린 사람들 마치 그림처럼 행복하면 좋겠어”(강인원·권인하·김현식·신형원의 ‘비 오는 날의 수채화’, 1989, 강인원 작사·작곡)

이 노래가 유행하던 80년대 후반은 대형 유리창으로 바깥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커피전문점들이 생기던 때였다. 대형 유리창 바깥으로 늘 보이던 매연 뒤집어쓴 뿌연 도시가, 비 덕분에 오랜만에 선명한 색깔을 빛내고 있다. 유리 안쪽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호사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이들은 먼지투성이 속에서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대도시의 번잡한 일상이 정말 싫어진 시대로 들어섰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부모 세대들이 그토록 바랐던 현대화된 도시가 이들에게는 답답한 족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오죽하면 김현철은 ‘비가 오면 서울도 괜찮은 도시’라는 제목의 노래를 지었겠는가. 이쯤 되면 대낮에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걸을 때에 해방감이 느껴질 것이다. 옷 버릴까 두려워하는 어른들은 미친 짓이라 했겠지만 말이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와 『광화문 연가』 등을 썼다.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