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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개전 초기의 진실 - 당시 정보국 북한반 선임장교 JP 회고 ②





6·25 61주년 기획 1950.6.25~28 가장 길고 처절했던 역사의 나흘
“육본 철수 때 좌익 전력 박정희가 안 보였다, 한강을 건넜을까 … 수원서 만난 뒤 이젠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1948년 10월 숙군 작업이 펼쳐지기 직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이 담긴 희귀 사진이다. 그해 10월 전남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여순 반란사건’ 진압을 위해 광주 토벌사령부에 내려간 박정희(왼쪽) 소령이 송호성 사령관(담배 문 이)과 협의를 하고 있다. 박 소령은 서울 복귀 뒤 남로당 군사책의 혐의로 숙군작업에 걸려들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극적으로 살아났다. 사진전문잡지 라이프에 실린 작품이다.





1950년 6월 25~28일. 리더십을 잃은 대한민국 군대는 계속 쫓겼다. 김일성 군대는 그런 국군을 집요하게 밀어붙였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장교였던 김종필(JP) 전 총리는 그때의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봤다. 한때 좌익 연루 혐의에 싸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도 그 대열에 있었다. 중앙일보 박보균 편집인과의 대담에서 JP는 박 전 대통령의 당시 행동, 한강 인도교가 끊어지는 장면 등을 회고했다.











6·25전쟁 때의 김종필



-1949년 연말에 ‘종합 적정 판단서’ 작성을 주관한 박정희 전 대통령(전쟁 발발 당시 문관으로 정보국 작전 정보실장)과의 역사적 만남, 그리고 전쟁을 거치면서 두 분이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 눈길을 끕니다. 박정희 실장은 전쟁이 터지는 순간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님 제사가 있다고 해서 50년 6월 21일 경북 구미에 내려갔지요. 떠나면서 제게 ‘상황이 이상하니 무슨 일이 터지면 바로 연락하라’고 했어요. 당시에는 전화 사정이 좋지 않아 경찰 지서를 통해 25일 전화를 걸어 찾아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알려드렸지요. 바로 상경했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전황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27일인가, 육본 상황실에서 만났지요.”



 -상황이 매우 급박한 때였습니다. 곧 서울을 떠나 후방으로 내려갈 시점 아니었습니까. 서울을 떠날 때 육본 지휘부는 우왕좌왕 균열 상태에서 서로 먼저 탈출했습니다.



 “나는 육본 상황실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어요. 28일 새벽이 되자 뭔가 육본 분위기가 썰렁해졌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둘러보니 나와 상황장교, 그리고 사병 몇 명만 남고 육본이 텅텅 비어 있었던 겁니다. 채병덕 총참모장이나 국장들이 육본 철수를 결정하면서 제대로 얘기도 해주지 않고 자기들만 먼저 떠났어. 부하들에게 한마디도 없이 말이지. 박 실장(박 전 대통령)도 그때 함께 따라간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나는 부랴부랴 육본 병기감실 앞에 있던 미국제 GMC 트럭을 찾아와 산더미 같았던 지도와 상황자료들을 뜯어 말아서 전부 싣고 철수 길에 올랐어요.”



 -문관 박 실장은 채 총참모장 대열에 끼어 함께 후퇴합니다. 그때 박 실장에게 48년 숙군(肅軍) 사건에 연루된 ‘좌익 중죄(重罪)’의 이미지가 육본 장교들 사이에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그의 후퇴 행적의 종착지가 어딘지를 미심쩍어 했던 장교들도 있었다는데요.









미 공군기가 1950년 7월3일 한강 철교를 폭격하는 장면. 오른쪽이 그해 6월28일 육군본부가 폭파한 인도교.






 “참, 그런 게 아직 남아 있었던 모양이에요. 우리도 그랬지요. 한강 다리가 폭파돼 간신히 배를 구해 건넌 뒤 우리가 시흥을 거쳐 임시 육군본부가 있던 수원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내려갈 때 제 일행이 몇 있었어요. 같은 정보국에서 근무하던 전재구 중위 등이었지요. 우리 일행의 화제가 무엇이었는지 알아요? 바로 박 실장 문제였어요. ‘박 실장이 그런 전력이 있는데, 과연 후방의 육본으로 가 있을까, 아니면 서울에 남을까’하는 문제 말이에요. 우리는 수원으로 이동하면서 그런 주제를 두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요.”











 -수원으로 이동하면서 장교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요.



 “이런 저런 추측들이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박 전 대통령이 수원에 오지 않을 거라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거란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수원 가서 박 실장 있으면 쓸데 없는 생각들 말자. 그렇지 않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말자’고 했거든….”



 -박 실장의 선택과 거취는 우리 역사에서 흥미 있는 대목입니다.



 “시흥에서 수원까지는 줄곧 걸어서 움직였는데, 저 멀리 수원초등학교가 보이고 이어 장도영 정보국장이 정문 앞에서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그 옆에 박 실장이 함께 서 있었죠. 우리 일행이 다가서서 정보국장에게 인사한 뒤 박 실장에게 ‘오셨구만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박 전 대통령이 쓴웃음을 짓더군. 28일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는 상황에서 보이지 않아 의심을 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나 수원초등학교 정문 앞에 서 계신 모습을 보니 정말 반갑습디다. 그 이후로는 박 전 대통령이 좌익이다 아니다라는 의심은 일절 사라졌지….”



 -처음 두 분이 만나시는 장면도 궁금합니다. 48년 숙군 작업에서 우여곡절 끝에 살아난 박 전 대통령과 육사 8기로 임관해 처음 정보국에 발을 들여 놓은 김 전 총리의 만남은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목인데요.









해리 트루먼
(미 33대 대통령·1884~1972)




 “육사 8기는 인원이 1300여 명으로 아주 많았어요. 내가 6등인가의 성적으로 졸업을 했는데, 당시 인원 보충이 필요했던 정보국에서 유양수 전투정보과장 등을 보내 100등 이내의 졸업생들을 정보국 요원으로 선발했어요. 그렇게 정보국에 뽑혀 전투정보과를 찾아갔더니 박 전 대통령이 계시더군요. 유양수 과장이 ‘이분에게도 인사를 드리라’고 해서 인사를 하려는데, 박 전 대통령이 ‘나 박정희요. 귀관들에게 신고 받을 신분이 아니니, 그냥 거기 앉으시라’고 말하더군요. 또 ‘육사를 우수하게 졸업한 장교들이라고 들었습니다. 환영합니다. 같이 노력하자’라고만 짧게 말했습니다. 얼굴이 새카맣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검은색 민간인 복장이어서 그랬는지 얼굴이 유난히 새카맣게 보였지요. 웃음이 잘 나오지 않는데도 억지로 웃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의 조기 폭파 논란은 우리 군의 혼란과 불안을 상징합니다. 수도 서울을 적에게 넘겨준 뒤 채병덕 총참모장의 육본 지휘부는 허겁지겁 한강을 넘어 후퇴했습니다. 이어진 채 총장의 폭파 명령은 불안, 강박관념, 명령체계 혼선 속에서 급속히 내려진 겁니다. 조기 폭파로 인한 실책 때문에 과도한 인명 손실을 낳았다는 비판과 논란이 있습니다.



 “참혹했어요. 모두 떠나간 육본을 마지막으로 나와 트럭을 탄 채 한강 인도교에 도착하니 밀려든 사람들로 길이 꽉 막혀 있었어요. 중지도 끄트머리에 도착하니 인민군 편의대(便衣隊: 사복으로 위장한 부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피란 대열에 끼어들어 ‘이제 다 끝났다’라면서 선동을 하고 다녀요. 대열에서 잠시 기다리는데 철교 저쪽에서 작은 섬광이 일더니 ‘꽝-꽝-꽝’하면서 뭔가 터져요. 다리 폭파였어요. 땅이 출렁이는가 싶더니 폭음과 함께 한강교 아치와 교각이 하늘로 치솟고 차량과 사람들이 튕겨 올라가요. 그러더니 사람들이 입고 있던 옷가지와 살점들이 후두둑하면서 떨어졌어요. 자동차와 싣고 있던 자료 모두 버리고 동빙고 방향으로 움직였어요.”



 -아주 긴박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결국 어떻게 강을 건너셨습니까.



 “육사 동기생 하나는 ‘후퇴하느니 여기서 차라리 죽겠다’면서 권총으로 자살했어요. 아주 참담한 심경이었지…. 서빙고에서 간신히 배를 찾았는데, 미국으로 떠나려는 미 군사고문단 가족들이 보여요. 그래서 그 사람들을 먼저 건너게 했지. 그들이 다 건너고 오전 11시쯤 되니까 남산 쪽에 이미 인민군들이 올라가 박격포를 쏘아대고 있었어요. 먼저 건넜던 동기생 하나가 ‘지금 못 건너면 죽는다’면서 고함을 치더구만요. 노인들 몇 분이 배를 저어 건너도록 도와줬는데 우리보고 그래요. ‘젊은 군인들이니까 빨리 건너 가. 하지만 다시 꼭 돌아와야 해’라고 해. 고맙지요. 그래서 서울 탈환 뒤에 그분들을 찾아 나섰어요. 그러나 보이지 않았어요. 아주 섭섭했어….”



 -해리 트루먼 당시 미 대통령의 참전 결정이 무기력한 리더십의 대한민국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습니다. 트루먼의 고향 인디펜던스에 가봤더니 그의 박물관 안의 모형 백악관 집무실 책상 위에 ‘책임은 여기서 멈춘다(The buck stops here)’고 쓴 팻말이 보이더군요. 참전 결정 때 트루먼이 보인 결단력과 신념을 읽었습니다.



 “그래요. 소련이 계획적으로 한반도를 석권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보고 즉각 참전 결정을 했어요. 아주 훌륭한 결정이었다고 봐요. 62년인가, 내가 미국을 들렀을 때 인디펜던스에 도착해 트루먼 전 대통령을 만난 일이 있어요. 트루먼이 ‘그때 내 결정이 무뎠습니다. 3차 세계대전이 난다고 영국이 강력한 행동을 취하는 것에 반대해 더 강하게 나서지 못했습니다’라고 회고하더군…. 그러면서 ‘더 과감한 결정을 했다면 한국의 입장이 더 좋아졌을 것…’이라고 후회를 합디다. ‘여기 있는 사람들(JP 일행), 참 안됐어’라고 그러면서 말이에요.”



정리=유광종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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