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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동안 100만 명 신용회복 신청, 이 부부처럼 … 17만 명 웃음 되찾았다

100만6명. 2002년부터 이달 15일까지 신용회복위원회에 신용회복(워크아웃) 지원을 신청한 이들의 숫자다. 신용회복 지원제도는 카드 사태로 금융채무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가 크게 늘며 사회 문제로 번지자 이에 대한 대책으로 2002년 10월 도입됐다. 신용불량자의 빚을 일부 탕감해 주거나 상환기간을 늘려주는 방식이다. 출범 초기엔 ‘퍼주기다’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 ‘신용질서를 어지럽힌다’는 부정적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미비점을 보완하고 제도가 정착되면서 저신용자들을 빚의 늪에서 탈출하도록 돕는 ‘희망 사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지금까지 16만8000여 명이 이를 통해 빚을 갚고 신용을 되찾았다. 김기열·박은영씨 부부도 그 예다.



[스페셜 리포트] 김기열씨 부부 신용불량 탈출기







서울 군자동의 작은 가죽옷 공장이 김기열(오른쪽)·박은영씨 부부의 일터다. 이들 부부는 신용회복 지원을 받아 6년간 빚을 갚아나간 끝에 올 3월 빚에서 완전히 탈출할 수 있었다. [김상선 기자]





2004년 10월 어느 날, 손을 꼭 잡은 부부가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센트럴빌딩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김기열(44)·박은영(47·여)씨 부부. 이 빌딩 6층 신용회복위원회에서 막 상담을 받고 나오는 길이었다. “도와준 것 모두 갚겠습니다.” 부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사업 실패를 만회하려고 2002년 다단계 사업에 뛰어든 게 화근이었다. 카드 돌려막기를 하다가 사채까지 끌어 써서 빚이 2억원으로 불어났다. 하루 20통씩 빚독촉 전화가 걸려 왔다. 사채업자들은 밤에도 찾아와 험한 말을 퍼부었다. 낮엔 가죽옷 공장에서 봉제 일을 하고 밤엔 청소차 운전, 새벽엔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했다. 둘이 일해 손에 쥐는 월 500만원 중 450만원을 빚 갚는 데 써도 빚은 줄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이 빚이 없어지려나.’ 암담했다.



 1년 넘게 아등바등하는 그가 딱했는지 어느 날 우리은행 채권팀 직원이 말했다. “열심히 해도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이십니다. 요새 언론에 많이 나오는 신용회복위원회에 가보시죠.”



그런 게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찾아가보니 상담실은 물론 계단과 건물 밖까지 상담받으려는 사람이 줄지어 있었다. ‘나랑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가슴이 뛰었다. 점심도 거르고 5시간 기다린 끝에 상담을 받았다. “될 것 같습니다.” ‘신용불량자’ 딱지를 단 지 1년 반 만에 들어보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신용회복 지원을 접수한 그날로 채권 추심 전화가 뚝 끊겼다. “아빠, 전화 안 오니까 너무 좋아.” 열 살 아들이 신기해했다. ‘죽을 각오로 마지막까지 가겠다.’ 다시 한번 각오했다.



 김씨 부부는 신복위의 개인워크아웃 제도를 통해 대부업체와 사채를 뺀 빚 8100만원 중 이자 1500만원 전부와 원금 일부를 감면받았다. 5200만원으로 조정된 빚을 6년 동안 월 76만원씩 갚아나가기로 했다.



 72개월은 720개월처럼 길게 느껴졌다. 부부가 밤낮으로 일했다. 밤에 청소차를 몰다 졸음운전으로 아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채무조정을 받지 못한 사채와 대부업체 빚만 해도 1억원이 넘다 보니 쉴 틈이 없었다. 그래도 단 하루도 넘기지 않고 신복위 돈은 제 날짜에 꼬박꼬박 갚아 나갔다. 받은 도움을 갚을 길은 그것밖에 없다고 여겼다.



 위기도 있었다. 사채 빚을 다 갚고 이제 좀 나아지나 했더니 지난해 초 건강에 이상이 왔다. 잠 못 자며 일하다 병을 얻은 것이다. 김씨는 석 달 동안 일을 놓아야 했다. 생활비가 빠듯해 한두 달 연체도 잠시 생각했다. 그때 부인 박씨가 말했다. “신복위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성실하게 빚을 갚아온 신용회복 지원자들에게 긴급 자금을 지원해주는 소액금융지원 제도가 있었다. 지난해 4월 신복위에서 300만원을 빌려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김씨는 “마지막이라고 느슨해져서 ‘연체해도 되겠지’ 하지 않기를 정말 잘했다”고 말했다.



 올 3월, 드디어 72번째 76만원을 갚았다. 무겁던 빚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이다. “끝나면 우리 명동 가서 만세 부르기로 했잖아요. 명동 안 가요?” 고등학생이 된 아들이 6년 전 얘기를 기억하고 물었다. “만세는 5년 뒤에 할 거야. 아직 안 끝났어.” 김씨가 대답했다. 앞으로 5년 동안은 전과 똑같은 마음으로 매달 76만원씩 모으겠다는 게 김씨 부부의 계획이다.



 5년 뒤에 뭘 하려고 하느냐고 묻자 김씨는 빙긋이 웃으며 얘기한다. “신복위에 가서 도와주신 분들에게 자랑 좀 하려고요. ‘예전 그대로 돈 모아 왔다. 한번 보라’고요. 전엔 번 돈을 다 빚 갚는 데 쓰니까 신이 안 났는데, 지금은 통장 잔액 쌓이는 거 보면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요.”



 10년 전 운영했던 가죽옷 공장도 다시 꾸리고, 방 두 칸 전셋집도 좀 더 키웠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무엇보다 다신 아이들이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는 생각이다. 김씨는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누구 하나 말도 섞으려 하지 않던 신용불량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준 신복위와 채무조정에 응해준 금융회사 모두에 감사하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 다짐처럼 말했다. “이제 일어섰으니까, 다시 주저앉지 않을 겁니다.”





다시 신용불량자된 ‘지원 1호’…“빨리 와서 빚 재조정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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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명의 신용회복 지원자가 모두 김기열씨 부부처럼 신용회복에 성공하는 건 아니다. 신복위에 따르면 지원자 중 30% 정도는 세 번 이상 연체 끝에 탈락했다. 신용회복 지원 1호 주인공인 이모(38)씨도 그런 경우다.



 이씨가 신용회복지원위원회(현 신용회복위원회) 명동지부를 찾은 건 2002년 11월. 당시 29세였다. 그는 은행과 카드사·캐피털사에 1900만원의 빚을 지고 있었다. 건강 때문에 일하던 식당을 그만둔 뒤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6개 카드로 돌려막기를 하다 신용불량에 이르렀다.



원금은 1000만원이지만 연 20%가 넘는 연체이자 때문에 빚이 배로 불어났다. 신용회복 지원 상담이 시작된 지 열흘 만에 나온 첫 신청자였다.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신불자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며 의지를 보였다.



 신용회복 지원으로 그는 이자 일부를 감면받고 남은 빚 1400만원을 월 23만원씩 5년간 분할 상환하면 됐다. 그는 이 돈을 2003년 4월부터 10개월간 갚아나갔다. 빚 독촉에서 벗어나면서 그의 인생도 달라지는 듯했다. 결혼도 하고 고깃집도 차렸다.



 하지만 위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2003년 말 미국에서 터진 광우병 파동이 직격탄이었다. 그는 “광우병 파동으로 사업이 망했다. 빚을 갚을 방법이 없다”며 2004년 2월부터 상환을 포기했다. 결국 3개월 연체 끝에 그해 5월 다시 신용불량자로 돌아갔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그가 다시 신복위와 연락된 건 지난해 6월이었다. 전화로 “예전에 신용회복 지원에서 탈락했는데, 다시 신청할 수 있느냐”고 상담을 요청해온 것이다. 마흔을 바라보는 그가 아직 빚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담원은 서류 작성 방법을 안내하고 꼭 방문해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1년이 되도록 아직 이씨는 신복위를 찾지 않고 있다.



 신복위 관계자는 “초기엔 원리금 감면 폭이 작아 중도 탈락이 많았지만 지금은 이자 전액은 물론 원금도 최대 50%까지 감면해준다”며 “이씨가 하루 빨리 재조정 신청을 통해 빚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글=한애란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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