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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읽는다]중국 대운하를 둘러싼 상인집단 흥망의 역사


『대운하와 중국 상인-회·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
조영헌 저
민음사, 611p, 38,000원



지난 5월23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중국 양저우(揚州)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사진이 공개됐다. 그는 왜 양저우에 갔을까? 91년 양저우를 방문했던 김일성 주석 때문이었을까? 양저우가 고향인 장쩌민(江澤民·강택민) 전 중국 국가주석 때문에? 김정일의 양저우 행은 자연스럽게 양저우가 어떤 곳인가라는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양저우는 총 연장 1,600㎞의 중국 대운하가 장강과 만나는 곳에 위치한다. 제국의 경제 중심지 강남에서 올라온 물자와 장강을 따라 올라온 물자들이 양저우에서 모여 제국의 수도 베이징을 향해 뻗어 있는 대운하를 통해 북상을 시작한다. 비유한다면 제국의 급소이자 ‘명치’와 같은 곳이다. 대운하는 제국의 수도 베이징의 생명줄이자 링겔이었다. 생산기반이 미비했던 베이징을 먹여 살린 조운길이 막히면 제국이 위기에 빠졌다. 대운하, 양저우의 안전이 최고 권력자의 최대 관심사항이었던 이유다. 청(淸)나라 강희제는 여섯 차례, 그의 손자 건륭제 역시 여섯 차례 대운하를 따라 남순을 거행했다. 양저우를 여섯 차례 찾은 것이다. 최고 권력자의 잦은 방문은 지역 경제를 부흥시켰다. 그 주인공은 장쩌민의 후계자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의 고향인 후이저우(徽州) 출신 상인 집단인 휘상(徽商)이었다.
15~18세기 세계 GDP의 20-30%를 차지하며 G1이었던 중국 경제의 대동맥은 대운하였다. 이를 무대로 전 중국의 경제를 호령했던 상인집단 휘상의 흥망사를 파헤친 역저 『대운하와 중국 상인-회·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가 최근 출판됐다. 저자 조영헌 홍익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가 2006년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서 『대운하와 휘주 상인』이란 제목으로 취득한 박사학위 논문을 5년 가까이 보강한 책이다. 이 책은 치밀하게 다양한 사회 경제적 변수를 고려해 입체적으로 대운하 주변의 도시와 상인을 파헤치고 있다. 조 교수의 지도교수인 오금성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명예교수의 학풍이 고스란히 풍긴다. 특히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든 학술서를 일반 교양서로 탈바꿈 시킨 저자의 고충 또한 높이 살만하다.
“수나라가 망한 것이 이 운하 때문이라 할지라도/ 지금도 천 리나 그 물길 따라 파도를 헤쳐 가고 있으니/ 만약 물 위의 궁전과 같은 용주(龍舟)가 없었더라면/ 우(禹) 임금의 공과 같이 논해도 적고 많음을 따질 수 없으리니.” 당나라 시인 피일휴의 시다. 이 시에서 노래하듯 대운하는 수양제(隋煬帝)의 공이다. 연인원 550만명을 동원해 20만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대운하가 뚤렸다. 수양제는 호화 선박을 타고 양저우를 세 차례 찾았다. 그는 근위병의 쿠데타로 최후도 양저우에서 맞이했다. 본 서는 특히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비롯해 조선시대 제주도 관리 최부의 저서 『표해록』을 비롯해 각종 역사 속의 견문록과 각종 중국의 역사 소설을 통해 대운하 주변 도시들과 그 속의 인간 군상을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운하가 오늘날 던져주는 함의는 뭘까? 중국의 황제권력은 대운하를 뚫을 힘은 있었지만 유지할 능력은 없었다. 이를 대체한 것이 지방의 엘리트 계층이었던 신사(紳士)였다. 19세기 중반이 넘어서면서 황하의 물길 변경과 태평천국의 난 등 국내외 변란으로 대운하가 막혔다. 국가 체제는 상인집단을 후원할 힘을 상실했고 곧이어 등장한 철도, 기선과 함께 구시대적인 경제 유통 체제는 막을 내렸다. 저자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대운하, 4대강과 관련해서는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중국의 대운하와 관련지어 말할 수 없다”고 말을 아꼈다. 그 답은 독자의 몫이란 이야기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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