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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아침] 더딘 슬픔

더딘 슬픔 - 황동규(1938~ )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무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重力)마저 놓치지 않으려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잔광(殘光)에 관해 생각한다. 전원을 차단했는데도 단번에 캄캄해지지 못하는 저 형광등의 웅얼거림을 생각한다. 아무도 밝히지 못하는 저 빛을 어떻게 꺼야 하나. 추억의 제설작업은 길가에 잔설(殘雪)을 남긴다. 조금씩 작아지고 조금씩 더러워지는 저 눈물은 또 어디에 내다버려야 하나. 채 잎 틔우지 못한 나뭇가지는 작년에 떨어버린 낙엽의, 그 없는 무게로 휘청댄다. 누구에게 건넬 수 없는 잔여(殘餘)다. 나 죽으면 그러하리라. 잠시 숨죽이고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죽은 그대가 지금 내게 그러하듯. 내게 남은 것은 여생(餘生)이지만 그대가 남긴 것은 잔생(殘生)이다. 가장 아픈 슬픔은 가장 더딘 슬픔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권혁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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