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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에게 쫓겨난 고종, 이토 빈소 찾아가 조문 ‘굴욕’

1909년 11월 5일 일본 도쿄에서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오른쪽 예복 대열 맨 앞이 조선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진가 권태균 제공]
안중근의 이토 사살에 매국친일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통감부문서'의 헌병대 기밀문서[憲機]는 ‘이완용이 이토 공(公) 피해 이후에 눈에 띄게 공포심을 갖게 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안중근이 일제 검찰의 신문에서 “이완용은 망국적 거괴(巨魁)로서 이토에게 자신의 직무를 팔아넘겼다”('안응칠 제5차 진술내용')라고 비판한 것처럼 다음 표적은 이완용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마냥 위축되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망국의 몇 가지 풍경⑪장충단 이토 추도식

그래서 이토에 대한 내각 차원의 성대한 추도식과 장례식을 준비했다. 헌병대 기밀문서[憲機: 2128호]에 따르면 11월 4일 오후 2시부터 3시45분까지 서울 장충단에서 이토에 대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전·현 내각 대신과 황족 원로, 궁내부를 비롯해 각 부의 고등관과 육군 장교, 황후와 엄비(嚴妃)가 보낸 사신이 참석했다. 같은 문서에선 “그 성대함은 아직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성회(盛會)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관·공립을 불문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참석시켜 추도회장을 채웠던 ‘조작된 성황’에 불과했다. 그뿐만 아니라 친위부(親衛府)의 보병 2개 중대를 참석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할 정도로 팽팽한 긴장 속에서 치러졌다.

1 백두산 정계비. 청나라는 토문(土門)을 두만강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추도식 직전 매국친일파들은 태황제 고종으로 하여금 통감관저에 마련된 이토 히로부미의 빈소에 가서 직접 조문하게 하려고 계획했다. '통감부문서' 1909년 11월 1일의 '태황제가 통감관저에 행림하신 내부 사정(太皇帝統監邸へ臨幸の內情)'이란 문서가 그 시말을 전해준다. 고종은 통감관저로 가서 조문하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 ‘내가 직접 통감관저로 가서 조문한다면 국민들이 어떤 감정을 갖겠느냐. 칙사를 보내는 것이 적당하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국왕의 물품 등을 조달하는 승녕부(承寧府) 총관(摠管) 조민희(趙民熙)와 농상부장관 조중응(趙重應)이 짠 후 조민희가 ‘직접 조문이 필요하다’고 건의하자 11월 2일 직접 조문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고종은 황후 민씨 사후 부인 역할을 하던 엄비(嚴妃)가 추도식에 직접 가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면서 상궁 김석원(金錫源)과 황태자 유모 2명을 보내는 것으로 조정했다. 고종은 11월 2일 통감관저로 가서 자신의 외교권과 왕위를 빼앗은 이토의 죽음을 애도했다.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2 간도협약의 일본 측 대표였던 특명전권공사 이주인 히코키치(伊集院彦吉). 3 간도협약의 청국 측 대표였던 외무부 상서회판대신 양돈언(梁敦彦). 4 서북경략사 어윤중은 간도를 조선 영토라고 확정지었다. 갑오개혁을 주도하다 아관파천 때 고종의 명으로 살해되었다.
경시총감(警視總監) 와카바야시(若林賚藏)가 소네(曾荒助) 통감에게 전한 경찰 비밀문서[警秘: 301호]는 11월 5일의 이토 국장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일본인은 물론 한인도 조기를 게양했지만 한인들은 경찰의 경고 및 한성부윤의 명령에 따른 조치였다는 내용이다. 오후 2시 장례식에는 1만여 명이 참석했지만 강제 동원된 84개 교의 학생 5000여 명이 포함되었다.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롯해 대원군의 장남이자 고종의 형인 이재면(李載冕)·준용(埈鎔) 부자, 대원군의 조카 이재완(李載完), 탁지부 대신 고영희(高永喜), 이하영(李夏榮)·민영기(閔泳綺)·권중현(權重顯)·이지용(李址鎔)·윤웅렬(尹雄烈)·임선준(任善準) 등 대한제국 강점 후 훈작을 받는 매국친일파들이 대거 참석했다.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조문(弔文)과 순종 비의 삼촌인 시종원경(侍從院卿) 윤덕영(尹德榮) 명의의 조사가 낭독되었다.

이완용 내각과 친일 경쟁을 벌이던 일진회는 이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같은 시각인 오후 2시 서대문 밖 연설당(演說堂)에서 회장 이용구가 회원 300여 명을 이끌고 참배하고 한석진(韓錫振)이 제문을 낭독하는 등 따로 행사를 치렀다. 일진회는 이토와 이노우에(井上馨) 등 문치파의 점진합방론에 반대하면서 야마가타(山縣有朋)·가쓰라(桂太郞)·데라우치(寺內正毅) 등 무단파(武斷派)의 즉각합방론을 추종했기 때문이다. 일진회는 도야마 미쓰루(頭山<6E80>)와 일진회 고문이었던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같은 낭인들이 조직한 흑룡회(黑龍會)와 손잡고, 점진합방론을 주장하는 이토의 통감 사직 운동도 전개했던 터였다. 일진회는 이토 사망을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할 호기로 여겼다.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이후 간도(間島)지역 조선인들이 큰 곤란에 처했다. 간도는 현재의 중국 지린(吉林)·랴오닝(遼寧)성 일대의 서간도와 두만강 북부 북간도의 통칭이다. '통리교섭 통상사무아문 일기(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日記)'> 등에 따르면 고종 20년(1883) 청나라의 길림·훈춘 초간국(吉林琿春招懇局) 진영(秦煐)과 청나라 돈화(敦化)현 지현(知縣) 조돈성(趙敦誠)이 함경도 경원부와 회령·종성부에 공문을 보내면서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두 청국 관원은 “올해 추수를 마친 후 9월 안으로 ‘토문(土門) 이북과 이서(以西) 지방의 조선 사람들을 모두 쇄환(刷還: 외국 등지에 있는 사람을 데려감)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해당 지역의 조선 사람들은 자신들이 개간한 토지가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에 명시된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조선 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숙종 38년(1712: 강희 51년) 두 나라가 백두산 분수령에 “(양국 경계는)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다(西爲鴨綠, 東爲土門)”라고 세운 '백두산정계비'해석 문제가 불거졌다. 청나라는 토문을 두만강이라고 주장했지만 토문(土門)과 두만(豆滿)은 음과 뜻이 모두 달랐다.'청사고(淸史稿)'길림(吉林)지리지' ‘영안부(寧安府)’조에도 “훈춘강에서 동북으로 토문령이 나온다(琿春河, 出東北土門嶺)”며 토문을 만주 지역의 지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주민들은 직접 백두산정계비를 찾아가 강의 발원지를 답사한 뒤 종성부사 이정래(李正來)에게 청국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호소했다. 이때 경원부에 있던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이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을 백두산으로 보내 정계비와 토문의 원류(源流)를 조사하라고 명했다. 김우식은 백두산정계비와 토문의 발원지를 조사한 결과 조선 백성들의 주장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래서 어윤중은 고종 20년(1883) 7월 종성부사 이정래에게 돈화현에 공문과 함께 '토문강과 그 이남 강토에 대한 옛 지도 모사본과 새 지도(土門江·分界江以南 舊圖移摸·新圖)'백두산정계비 탑본(榻本: 탁본)'을 보내게 했다. 어윤중은 양국에서 각자 관리를 파견해 '백두산정계비'와 강의 발원지를 답사하고 그 내용에 따라 국경을 분별하자고 요구할 정도로 자신이 있었다.

1903년 의정부 참정 김규홍(金奎弘)은 고종에게 간도시찰관 이범윤(李範允)을 북간도(北間島) 관리(管理)에 임명하자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북간도는 바로 우리나라와 청나라의 경계로…수십 년 전부터 함경북도 연변의 각 고을 백성들이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람이 수만 호에 10만여 명이나 되는데, 청나라 사람들에게 혹독한 침탈을 받고 있다('고종실록' 40년 8월 11일)”고 말했다. “백두산정계비 이후 토문강 이남 구역은 우리나라 경계로 확정되었다”는 설명을 덧붙여서다. 조선은 서간도를 평안북도에, 동간도(북간도)를 함경도에 편입시키고 이범윤을 북간도 관리로 임명해 간도에 상주시켰다. 이후 간도 백성들은 대한제국에 세금을 납부했다.

그러나 일제는 1909년 9월 4일 북경에서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을 맺어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었다. “도문강(圖們江)을 청·한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의 발원지역은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되 석을수(石乙水)를 양국의 경계로 할 것”(제1조)이라고 정해 토문(土門)을 도문(圖們)으로 둔갑시켰다. 1907년 12월 28일 하야시(林) 외무대신은 소네부통감에게 보낸 '한·청(韓淸) 국경 논쟁의 사적(史的) 배경 설명과 앞으로의 해결과제 지시'에서 청나라 진영(秦煐)이 석을수를 국경으로 주장한다고 말했는데, 일본 측은 이를 그대로 인정해준 것이다.

1909년 9월 2일 일본의 고무라(小村) 외상은 소네통감에게 '청일간 간도 문제 해결에 따른 간도파출소 철퇴 대비 건'이란 문서를 보내 “간도 문제에 관해서는 청국의 영토권을 승인하는 것 외에 또 잡거 한국인에 대한 재판권을 청국에 주고…간도 주재 파출소는 머지않아서 철퇴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09년 10월 19일 통감부 총무장관 이시즈카(石塚)는 고다마(兒玉) 서기관(書記官)에게 '간도파출소 철퇴의 건'을 보내 “간도파출소는 이달 27일경 철퇴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렇게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한국의 영토 간도를 불법적으로 팔아먹음으로써 현대 한국사의 지형에 큰 변화를 초래했 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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