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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lobal] 응급실에서 병실로 이동시간 24시간에서 12시간으로 확 줄였죠





미국 ‘프레스비테리안’ 병원혁신위 린 김





미국 교육개혁의 중심에 미셸 리가 있다면, 의료개혁의 중심에는 린 김(47)이 있다. 한인 1.5세인 그녀는 컬럼비아대·코넬대 병원 등 4개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뉴욕 프레스비테리안 병원혁신위원회 위원으로 소속 4개 병원의 운영 개혁을 총지휘하고 있다. 병원혁신위원 20명 중 4개 병원을 총괄하는 위원은 린 김을 포함해 세 명뿐이다. 그녀는 현재 1만7000여 명이 근무하는 이 병원들의 심장·항암 치료의 안전문제 개선에 주력하고 있다. 어린 시절 겪었던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한 장애를 딛고 의료개혁의 중추로 굳게 일어선 린 김을 만났다.  



뉴욕중앙일보=강이종행 기자 kyjh69@koreadaily.com

 



김씨가 미국에 온 건 열세 살 때인 1977년. 김씨의 부모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로 이민 와 채소가게를 차렸다. 늘 적극적이었던 김씨는 곧 우등생이 됐으며 치어리더까지 하며 백인이 대부분이던 학교에서 선망의 대상이 됐다.



●교통사고가 있었다던데요.



“열다섯 살 때 친구가 몰던 스포츠카를 타고 쇼핑을 가다가 차량이 전복되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척추 뼈가 부러졌고 신경을 다쳐 결국 하반신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게 됐지요.”



●사춘기 소녀로서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 같네요.



“8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했고 이후에도 재활병동에 있어야만 했어요. 그곳은 이 세상 모든 장애인이 모인 곳 같았어요. 그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았고, 여러 번 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 칼을 숨겨 베개 밑에 숨겨놨어요. 목숨을 끊으려고요. 발각돼 빼앗겼지만…. 불을 질러 소동을 벌인 적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극복했나요.



“1주일에 한 번 이상 정신과 치료도 받았어요. 당시 나를 담당했던 의사가 나를 살렸어요. 그는 내가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알게 해줬죠. 보모님의 헌신도 큰 힘이 됐어요. 장애인으로서 어떻게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운전을 할 수 있는지 갓난아기가 걸음마하듯 하나하나 배웠어요.”



사고 후 1년 반 만에 학교로 돌아갔다. 뒤떨어진 공부를 따라잡기 위해 매일 새벽까지 공부했다. 성적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졸업 때 우등상을 받기까지 했다.



●왜 약대를 갔나요.



“집에서 가까운 메릴랜드대에서 생화학을 전공했어요. 3년 만에 조기졸업하고 의대에 가려 했지만 육체적으로 덜 힘든 약사를 하라는 아버지의 조언으로 펜실베이니아주의 필라델피아 약대를 선택했지요.”



이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 혼자 산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어려울 때마다 책에 더 집중했고 과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병원 일은 언제부터 시작했나요.



“대학 4학년이던 1987년 남편(콜린 김·47)을 만났어요. 2년 뒤 결혼했는데, MIT와 스탠퍼드, 카네기멜런 등에서 공부한 남편을 따라다니며 보스턴의 베스이스라엘병원, 스탠퍼드 대학병원, 존스홉킨스병원 등에서 임상 약사로 근무할 수 있었어요.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96년 뉴욕 프레스비테리안 웨스트체스터병원에 임상 약학과 디렉터로 영입됐어요.”



●가장 먼저 한 일은 뭔가요.



“스탠퍼드나 존스홉킨스 병원 등 미국의 톱 병원과 비교했을 때 부족한 점이 많았어요. 이들 병원에서는 약사들이 전문가로서 의사들을 교육했죠. 의사들은 약사들에게 어떤 약을 투여해야 할지 의논했어요. 하지만 우리 병원의 약사들은 제약실에서 약만 만들고 있었습니다. 매일 약사들을 교육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어요. 2003년까지 디렉터로 일하면서 의사들의 생각을 바꾸고 약사들의 수동적 태도를 버리게 했지요.”



●혁신위원회는 어떻게 참여했나요.



“2003년 병원 최고운영책임자(COO)로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병원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새로 구성하는 혁신위원회 위원으로 추천하겠다고요. 그동안 변화를 이끈 성과를 인정한 것이죠. 당시 병원 측은 최고 중의 최고만을 뽑아 병원을 싹 바꾸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이 쉽진 않았을 텐데요.



“파격적인 대우만큼 일이 혹독했어요. 첫 임무는 4개 병원 응급실을 개혁하는 거였죠. 이전까지 약사 업무만 하던 제게 응급실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어요. 작은 물고기가 처음으로 바다에 나간 것 같았어요.”



●바다에서 처음 한 일은 무엇이었나요.



“인터뷰였어요. 각 병원의 응급실장 등 책임자들을 모두 개별적으로 만났지요. 각 병원에 30여 명씩 120명이 넘는 사람들한테 응급실 운영의 문제점과 해결책 등을 들어 하나하나 기록했지요. 매일 오전 6시에 출근해 퇴근 후에도 다음날 오전 2시까지 일하기를 밥 먹듯이 했죠. 연구 끝에 800만 달러의 예산으로 응급실 대수술에 들어갔습니다.”



●결과는 어땠나요.



“응급실에 환자들이 도착해 응급치료를 받고 병실로 이동하기까지 24시간 걸렸던 컬럼비아대 병원의 경우 12시간으로, 코넬대 병원은 18시간에서 9시간으로 단축됐어요. 이런 성공 사례가 알려지자 오히려 존스홉킨스 대에서 특별 세미나를 부탁하기도 했죠.”



●줄곧 혁신위원회에 있었나요.



“병원 운영을 담당하는 운영발전부서로 옮겨 1년여 동안 디렉터로 근무했어요. 그런데 2006년 다시 혁신위원회에서 일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이번 임무는 심장병과 암 관련 안전문제를 개선하는 거지요. 익숙해져서 처음보다는 여유가 있지만 책임은 훨씬 커졌지요.”



●장애가 걸림돌이 된 적은 없었나요.



“목표를 성취하는 데 장애는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어요. 나 스스로 장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지도 않아요. 일 하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하고 즐거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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