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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조선식 산성





서기 663년 백강 해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신라·당 연합군이 일본열도까지 침공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내륙인 규슈(九州)에 다자이후(大宰府)란 관청을 설치했다. 신라·당 연합군의 침공을 저지하는 전시사령부 같은 것인데, 현재 후쿠오카(福岡)현에 있는 다자이후시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다자이후 시내에 당시 관청터가 남아 있는데, 거대한 건물 초석은 신라·당 연합군에 맞서려던 백제 유민(遺民)들의 결의를 짐작하게 한다. 이 전시사령부를 지키는 해상 최전선이 대마도와 이키섬의 조선식 산성이었다. 대마도와 이키섬이 함락되어 내륙에서 전투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 다자이후 시내에 나성(羅城)을 쌓고 주위 산에는 산성을 쌓았다. 『일본서기』는 664년 “축자(筑紫:쓰쿠시)에 큰 제방을 쌓고 물을 저장해 수성(水城)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다자이후를 마주보고 대야성시에 대야성(大野城:오노조)을, 사가(佐賀)현에는 기이성(基肄城:기조)이란 산성을 각각 쌓았다. 대야성은 해발 410m 높이의 사왕사산(四王寺山)을 둘러싼 산성이고, 기이성은 기산(基山)과 방중산(坊中山)의 두 봉우리에 걸쳐서 쌓은 산성이다. 자연석을 다듬어 수직으로 쌓아올린 성벽과 산의 능선을 따라 흙을 다져넣는 판축(版築) 방식의 토루(土壘)로 산을 에워싼 전형적인 백제식 산성이다. 평지에 나성을 쌓고 배후에 산성을 쌓는 축성 방식은 그때까지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다. 장기항전을 위해 계류나 우물이 있는 곳에 산성을 쌓는데 기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현지인들이 약수로 사용할 정도로 맑다.

 그러나 산성을 쌓은 백제유민들의 예상과는 달리 신라·당 연합군은 쳐들어오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당나라에 견당사(遣唐使)를 보내 국교를 텄다. 전쟁 가능성이 옅어지자 조선식 산성은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성벽과 토루가 허물어지거나 우거진 수풀에 가려지게 되었다. 뒤늦게 성벽을 발견한 일본인들은 신롱석(神籠石)과 연관 짓기도 했다. 이 일대에만 존재하는 신롱석식 산성은 해발 200~400m의 산 정상에서 중턱에 걸쳐 70cm~1m 높이로 길게 쌓은 석성이다. 신롱석은 『일본서기』『속일본기(續日本紀)』 등에는 나오지 않는 신비한 산성인데 조선식 산성과 연관 지어 연구할 필요가 있다. 최근 대야성과 기이성의 조선식 산성들에 올라가 보니 홍수에 일부 무너진 성벽과 토루들이 보였다. 해외의 우리 역사유적 보존에도 여력(餘力)을 좀 보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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