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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19)세계의 이목 따돌린 키신저와 칸의 명연기













▲1971년 7월 9일 오후, 명연기를 펼친 끝에 베이징을 비밀 방문한 미국 대통령 닉슨의 밀사 키신저와 총리 저우언라이. 1949년 중공 정권 수립 후 중·미 양국의 첫 번째 고위층 만남이었다. [김명호 제공]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함께 밀실 비슷한 회의실에 들어간 파키스탄 대통령 아히야 칸은 “중간 역할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며 미국 대통령 닉슨의 말을 전했다. “미국 국민들은 중국과의 관계가 개선되기를 바란다. 밀사를 보내고 싶다. 우호관계 수립이 최종 목적이다.” 저우는 곧바로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에게 달려갔다. 이튿날 마오는 “그간 파키스탄에 대한 지원이 너무 미약했다”며 앞으로 신경을 더 쓰라고 지시했다.



1개월 후, 저우는 파키스탄 주재 중국대사 장원진(章文晉·장문진)편에 “중국이 이제껏 바라던 일이다. 그간 우리는 평화를 위한 담판이라면 뭐든지 해보려고 노력했다. 되고 안 되고를 가리지 않았다. 닉슨 대통령의 특사파견을 환영한다. 일국의 국가원수가 제3국의 국가원수를 통해 전한 말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회답을 보냈다. 파키스탄과의 연락을 전담시키기 위해 장원진은 귀국시켰다.



12월 25일, 인민일보에 “미국인을 포함한 전 세계의 인민들 모두가 우리의 친구”라는 구호가 실렸다. 평소 마오 어록이 한 구절씩 실리는 자리였다. 12년간 억류했던 미국인 주교도 석방했다. 이 미세한 변화를 눈치챈 중국인은 거의 없었다.



71년 7월 1일, 700년 전 중국을 찾은 마르코 폴로의 이름을 딴 ‘폴로 계획’의 막이 올랐다. 닉슨의 외교안보 보좌관 키신저를 태운 비행기가 워싱턴을 출발했다. 외부에는 사이공·방콕·뉴델리·이슬라마바드 방문이라고 발표했다.



저우언라이도 손님을 맞기 위해 소조(小組)를 조직했다. 조원들에게 외부 출입, 전화 사용, 필기도구 지참을 금지시켰다. 국빈관인 댜오위타이(釣魚臺·조어대) 5호를 키신저의 숙소로 정했다. 4호에는 저우언라이가 머물고 6호는 비워놨다. 거리 골목 할 것 없이 “미 제국주의와 주구들을 타도하자!”는 구호가 난무할 때였다. 체 게바라가 다녀갔고 김일성이 즐겨 묵던 5호도 예외일 수 없었다. 덕지덕지 붙어있는 선전화와 표어들을 떼어내고 쉬베이훙(徐悲鴻·서비홍)과 치바이스(齊白石·제백석)의 그림을 내걸었다. 회의실 구석에 미니 바도 만들었다.



문제는 꽃이었다. 원래 댜오위타이는 백화가 만발한 곳이었다. 문혁을 치르며 화초란 화초는 다 뽑아버렸기 때문에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군인들이 주둔하는 바람에 아름답던 정원이 반찬 조달용 채소밭으로 변해있었다. 베이징 바닥을 샅샅이 뒤져도 꽃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저우언라이가 은퇴한 정원사의 집을 가보라고 했다. 역시 저우는 머리가 좋았다. 중산공원에 근무하던 노인의 집 뒷마당에 꽃이 가득했다. 화분 10개에 옮겨 심었다. 오리를 굽기 위해 중국식 화덕도 설치했다.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한 키신저는 배우로 변신했다. 세계외교사에 영원히 남을 연극을 시작했다. 대통령 초청 만찬 도중 갑자기 배를 움켜 잡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복통을 호소했다. 당시 파키스탄에는 이질이 유행이었다. 아히야 칸의 연기도 키신저 못지않았다.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의사를 부르고 어쩔 줄 몰라했다. “이슬라마바드는 날씨가 너무 덥다. 치료와 요양에 문제가 많다. 산간지대에 있는 대통령 별장으로 모시겠다.” 키신저는 몸을 제대로 못 가누면서도 괜찮다며 고개를 휘저었다. 아히야 칸은 그러다 큰일 난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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