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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역사에 남는 대통령’의 길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김정일 위원장 핵안보정상회의 참석, 비핵화 실천의지 전격 표명” “오바마-김정일 정상회담 개최, 북·미수교 극적 합의” “이명박-김정일 회동, 남북관계 정상화 필요성 공감, 북 개혁·개방에 남 적극적 지원의사 천명”…. 2012년 3월 27일 아침 일간지 헤드라인이 이렇게 장식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한반도 천지개벽이요, 이명박 대통령은 역사에 길이 남는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은 상상에 불과하지만 비상한 외교적 상상력과 노력이 있다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라고 믿는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진정성이다.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은 내년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에 김 위원장을 초청하겠다는 이른바 ‘베를린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회의 개최 예정일인 2012년 3월 26일은 공교롭게도 천안함 피폭 2주년이 되는 날이다. 천안함 사건이 자신의 소행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평양이 과연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초청했지만 북이 수용하지 않았으므로 남은 대안은 국제사회의 집단적 제재뿐”이라는 논리를 펼 명분 쌓기가 베를린 제안의 숨은 의도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앞서의 장밋빛 그림은 그저 몽상에 불과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천안함·연평도 문제에 대한 북측의 사과가 선행돼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하는 한 김 위원장의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은 어렵다는 게 냉정한 상황판단이다. 다른 길이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이 때문에 국익의 관점에서 원칙을 새롭게 성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근 출간된 키신저의 역저 『중국에 대해(On China)』는 이와 관련해 곱씹어 볼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자신이 닉슨 대통령과 함께 독재자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을 선뜻 만난 이유는 바로 국익 때문이었다는 대목이 그렇다. 키신저는 또한 인권을 강조하면서도 중국과 수교를 진행한 카터 전 대통령이나 이른바 ‘가치외교’를 표방하면서도 대중(對中)관계를 원만히 유지한 조지 부시 대통령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국익이 원칙과 가치보다 앞설 수 있다는 것이다.



 과정의 중요성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 정부는 ‘비핵·개방·3000’과 ‘그랜드 바긴’을 표방하면서 북핵 문제의 일괄타결을 주장해 왔다. 시간만 잡아먹는 북측의 ‘살라미 전술’에 더 이상 속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불신과 적대상황 속에서 일괄타결은 가능한 시나리오일 수 없다. 울화가 치밀고 경멸스럽다 해도 인내심을 갖고 점진적으로 신뢰를 쌓아 돌파구를 만드는 것이 키신저가 말하는 ‘냉철한 국익’을 위한 길 아닐까.



 이를 위해서는 먼저 남북대화를 조속히 재개해야 한다. 조건 없이 만난 뒤 그 자리에서 따지고 사과를 받아내면 될 것 아닌가. 특히 북한이 이명박 정부와의 대화에 대한 희망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는 이유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5·24조치에도 불구하고 개성공단만큼은 유지해온 것이 큰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인도주의적 식량 지원도 재개해 국제사회에서 한국만 외톨이가 되는 일도 피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남북대화를 통해 북·미대화와 6자회담이 재가동될 수 있도록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북측과의 물밑 대화는 필수적이다.



 지금 정부가 내건 문장은 조건문이다. “북한이 핵 포기 의사를 진정성 있는 방식으로 국제사회와 합의하면”이라는 전제가 달려 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6자회담이야말로 그러한 합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6자회담에서 사전 조율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핵안보정상회의 같은 국제무대에서 공론화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인 것이다. 더욱이 북한은 6자회담이 순항하는 동안에는 기만적인 도발을 한 적이 없고, 거꾸로 회담이 교착되고 대북 강압외교가 펼쳐질 때마다 허를 찌르는 행동으로 판을 흔들려고 시도해왔다. 6자회담 재개를 서둘러야 하는 이유이자 ‘폐쇄-봉인-불능화-폐기’라는 2·13합의의 단계별 핵 폐기 프로세스 재가동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다. 핵안보정상회의의 기적은 이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남는 대통령의 길’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것이다.



 청와대 참모들은 이제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 유산을 생각해야 할 때다. 현실에 터를 잡지 않은 원칙만 강조하다 실패한 대통령이 되도록 놔둘 것인가. 원칙의 고수가 정책의 실패를 결코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발상을 전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시간이 없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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