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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쉴 수 있어 느낄 수 있다면 … 그게 아름다움의 진정한 모습

김병종 화가가 1994년에 발표한 ‘생명의 노래’ 연작 중의 하나. 그는 “꽃과 나무에도 심장이 있다, 눈동자가 있다, 생명의 혼이 있다는 생각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민현식 건축가
변화하고 생성하는 건 모두 아름답다


“바람과 햇빛에 / 끊임없이 출렁이는 / 나뭇잎의 물살을 보아라 // 사랑하는 이여…. 아름다움을 얘기하라고 해서 바로 이 시가 떠올랐다. 1970년께 수첩에 적어놓고 가끔씩 읊조리는 시다. 시를 읊을 때마다 나는 도면에 ‘잎과 가지가 좋은 나무를 심어야겠다’고 쓰곤 한다. 그것들이 바람과 햇빛에 출렁이는 순간을 기대하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아름다움이 대상 자체에 근원적 질서로 내재돼 있다고 생각해왔다. 현악기의 아름다운 소리가 현의 길이의 수학적 질서에서 나온다는 것을 발견한 피타고라스는 환호했다. 그는 모든 것들이 수적으로 질서 있게 배열돼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믿었다. 플라톤은 한발 더 나가 ‘척도와 비례가 유지되면 아름다운 것이며 이것의 결핍은 추한 것’이라고 했다. 수적 비례에 의한 미의 이론은 18세기까지 진리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아름다움이란 끊임없는 생성과 변화 속에서 가능하다고 본다. 앞서 읊은 시처럼 아름다움은 ‘나뭇잎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나뭇잎이 햇빛과 만나 끊임없이 출렁일 때’ 생성된다는 얘기다. 내 전공인 건축의 측면에서 보면 그 자체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집은 없다. 집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만나는 순간의 횟수와 같다. 오늘은 어떤 빛이 들어오는지, 내일은 어떤 바람을 맞는지…집이 건물로 남아 있는 날까지 집은 매일 새로운 아름다움을 경험할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변화와 생성의 관점은 조선 선비들이 잘 보여준다. 조선의 정자나 누각의 아름다움은 공간 자체에 있지 않다. 공간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 시시각각 변하는 장엄한 자연과 교통하면서 아름다움이 생기기 시작한다. 거듭되는 변화를 본질로 하는 아름다움이다. 내겐 바람과 햇빛에 끊임없이 출렁이는 나뭇잎의 물살, 더불어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것은 모두 아름답다.”

전중환 진화심리학자
인간과 무관하게 영원한 미의 본질은 없다

“‘소녀시대의 윤아는 왜 예쁠까?’ ‘꿀은 왜 달까?’ ‘날씨가 흐리면 왜 우울할까?’ 너무 당연해 바보 같아 보이는 이런 질문들 속에 ‘아름다움’에 대한 답이 있다. 우리 진화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은 모두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것들이라고 설명한다. 수백만 년 전 인류의 조상들은 수렵·채집 생활에 도움이 된 것을 아름답다고 느꼈다. 꿀이 원래 단 것이 아니라 꿀과 같이 포도당 분자를 함유한 것들이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기 때문에 인간이 달다고 느끼는 것이다. 소녀시대의 윤아가 예쁘다고 여기는 것도 이런 외모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여성호르몬 분비가 많아 이들과 짝짓기 하고 자식을 낳는 것이 번식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나 더,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그림은 뭘까?’ ‘중국인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림은?’ ‘아이슬란드인은?’ ‘케냐인의 선호는 어떻게 다를까?’ 러시아 출신 화가 코마와 멜라미드는 세계 10개국 사람들이 선호하는 그림을 조사해 평균을 냈다. 놀랍게도 이들이 원하는 그림은 비슷했다. 푸른 하늘 아래 산과 나무가 있고 물이 흐르는 그림. 그 앞에서 아이들과 짐승이 한가로이 물을 마시는 평범한 그림. 이 요소들은 풍부한 음식을 제공하고 비바람 피하게 해주고, 맹수를 피할 수 있는 피신처를 제공하는 것들이다. 즉 인종·기후·문화와 관계 없이 생존과 진화에 도움되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긴다는 증거다. 이런 선호는 어린 8~11세 그룹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아름다움을 진화적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영원히 공통적으로 지니는 미(美)의 본질은 없다. 생존과 진화에 도움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존재할 뿐이다. 내 주장이 다소 도발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 튀는 얘기가 심포지엄을 아름답게 한다고 믿는다.”

최창조 풍수학자
완벽한 땅이 없듯 완벽한 아름다움도 없다

“1950년대 중반, 우리 집은 청량리 피란민 촌에 있었다. 길가에는 사살당한 공비의 시체가 뒹굴었고 사방을 둘러봐도 미나리꽝뿐이었다. 우유 가루를 물에 풀어 밥솥에 쪄 먹던 배 곯던 시절이었다. 전혀 아름다울 리가 없는 이 풍경을 나는 아름답다고 기억한다. 이처럼 아름다움은 주관적이다. 명당도 마찬가지다. 명당과 길지(吉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사람과 조화를 이루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풍수를 싫어하던 선친은 당신이 개간하던 경기도 여주와 양평 쪽의 땅에 묻혔는데 정북향이었다. 지관들이 ‘참척(慘慽-자식이 먼저 죽음)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얘기하더라. 하지만 아버지가 당신이 좋아하던 땅에 묻히고 싶을 것 같아 거기 모셨다.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게 명당이고 아름다움처럼 주관적인 거다. 나는 자생풍수가 있다고 본다. 명당과 길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람과 조화를 이루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내가 가 본 명당은 대부분 문제가 있었다. 황해북도 사리원시에 성불사라는 절이 있다. 정방산성이라는 곳인데 비만 오면 대웅전까지 물이 찬다. 상습 침수지대에 절을 세운 거다. 땅이 아파서 고쳐드리고 달래기 위해 절을 짓고 탑을 놨다고 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상당히 실용적 조치를 취한 걸 알 수 있다. 황해도 만백평야의 수원지가 바로 정방산성에서 시작된다. 이 수원지만 잘 지키면 홍수 피해를 막을 수 있다. 병든 명당의 대표적인 곳이다. 남한에도 이런 곳이 많다. 아픈 곳을 고치기 위한, 치유로서의 풍수가 있는 것이다. 땅을 보듯 사람을 보면 된다. 이게 풍수의 결론이기도 하다. 완벽한 땅이 없는 것처럼 완벽한 사람도 없다. 풍수무전미(風水無全美)라 한다. 풍수에 완전한 아름다움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론 가장 아름다운 땅이 있다. 1960년대 찾아갔던 제주도 우도다. 그래도 여전히…나는 아름다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최 교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의자가 ‘꽈당’ 하며 넘어졌다.)

홍승수 천문학자
섞인 것이 순수하고 아름답다

“나를 홀딱 반하게 했던 대상은 무지개다. 6·25 휴전회담 직후 서울 인구가 수십만 명일 때 초등학교 4학년이던 나는 서울 한복판에 뜬 무지개를 잡으러 쫓아갔다. 어쩌면 내 한 평생은 무지개에 홀려서 빛과 함께 한 그런 인생인 것 같다. 당시 내가 쫓았던 무지개의 가장 큰 매력은 색채감이었을 것이다. 무지개의 색채감은 태양이라는 특별한 광원에서 나오는 복사(輻射)를 받아들여 생기는 것이다. 우리 같은 고등한 생물이 살고 있는 다른 별이 있다 치자. 그들의 광원이 태양처럼 강렬한 빛을 내지 못한다면 그 세상의 무지개와 색깔은 우리가 느끼는 것과 꽤 다를 것이다. 미의 기준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사람 시각은 대개 노랑에서 연두색 근방의 파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빛의 파장에 따른 사람 시각의 반응 정도는 태양 에너지 파장의 세기 분포와 일치한다. 사람이 태양에 기가 막히게 맞춰져 있고 그에 따라 진화했다는 얘기다.

쌍무지개를 보면 안에 하나의 무지개가 있고 밖에 또 다른 하나가 있다. 보통 태양에서 나오는 백색광이 물방울을 통과할 때 이 빛이 굴절되면서 무지개가 생기는 것이다. 직경 1㎜ 정도의 물방울이 가장 무지개를 아름답게 만드는데, 쌍무지개는 빛이 전파되는 속도가 다를 때 생긴다. 대기 중의 물방울이 프리즘 역할을 한다. 백색광을 프리즘에 투영시켜 보면 백색광은 사실 여러 개가 섞인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최재천 교수가 ‘섞여야 아름답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섞인 것이 순수하고 아름답다’고 말하겠다. 무지개가 내게 아름다운 첫째 이유는 무지개가 겉으로 드러난 세상만사의 이면에 숨어있을 우리네 삶의 중층성 내지 다면성을 일깨워주는 단초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무지개의 원리를 얘기했다고 해서 무지개에 대한 매력을 잃지 않길 바란다. 사실을 사실로 끝내면 재미도 없고 시심(詩心)을 잃을 것이다. 사실 너머 숨어 있는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과학만이 하는 일이 아니다. 과학은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인간이 훨씬 더 깊은 시심을 찾을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존재다.”

안상수 디자인
한글 점 하나로 우주를 그리다

“내 인생의 아름다움은 한글이다.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면 떠오르는 게 한글뿐이다. 한글이 없다고 상상을 하면 앞이 캄캄하다. 집현전 학자가 훈민정음 책 중간에 ‘우리 역사 어두운 1000년을 빛으로 열었도다’라고 썼다. 중국에 종속돼 있던 당시의 세계관을 볼 때 한글의 탄생은 설명할 수 없는 충격이자 혁명적 아름다움이다.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가 빌려 쓴 중국의 한자는 근본적으로 문법도 다르고 발음도 달랐다.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우는 격’이다. 영문은 5000년 됐다. 영문을 100살로 비유해보면 한자는 올해 환갑 정도, 일본은 24살, 우리는 12살 정도다. 12살짜리가 당돌하기 짝이 없는 거다. 디자인 측면에서 봐도 한글이야말로 진짜 디자인이다. 한글은 글자 하나가 한자 전체의 조형을 제압할 정도다. 아름다운 것 중에는 복잡한 게 없다. 옛 고전에 ‘하늘은 쉽고 땅은 간단하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한글은 쉽다. 실제로 언어학자가 실험을 했는데 한글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글자라고 한다. 외국사람한테 한글을 가르치면 대개 차 한 잔 마시는 시간 동안 읽는 걸 깨우친다. 그리고 쉬움 이전에 단순한 명료함이 있다. 우리 민족의 긴 역사에서 창의적으로 아름다움을 지어낸 게 한글밖에 없다. 이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다듬어지고 자라서 큰 우주 속으로 자라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스케일 자체가 다른 것이다. 칸딘스키는 점을 울림이라고 했다. 세종은 점을 하나 찍고 이건 우주를 상형한다고 했다. 이건 정말 큰 멋, 큰 멋 지음, 큰 아름다움이다. 나는 한글의 아름다움과 같이 사는 게 행복하다.”

이건용 작곡가
사물이 아니라 느낌의 순간이 아름답다

“꽤 오래 전부터 작곡을 시작해 50년 가까이 예술활동을 해왔지만 ‘아름다움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음악을 시작하기 이전의 소년 시절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때 시를 쓰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황금빛 노을이 나뭇가지를 아이보리 블랙으로 아로새길 때…’라는 첫 글귀를 아직도 기억한다. 옛 메모를 뒤적이니 ‘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가로등’ ‘생선 굽는 냄새가 나는 골목’ ‘밤의 창문’도 보였다. 늘 보던 가로등, 나뭇가지나 별이 문득 시로 다가오는 어느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에 내 눈과 만나는 것들이 바로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내겐 아름다운 사물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체험한 순간이 존재한다. 일상에서 벗어난 순간, 삶의 대책 없는 슬픔과 약동이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에 느끼는 아름다움이다. 한국적인 산의 모습, 비 냄새, 낙엽의 향기, 황혼…. 이런 것들은 좀 더 쉽게 그 순간과 연결해준다. 10년 동안 쓴 실내악곡의 연작 제목이 ‘저녁 노래’였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저녁 시간에 갖게 되는 정취와 마음, 그 순간에 대하는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만들었다.

누군가 내게 ‘어떤 음악을 쓰세요?’ 하고 물으면 나는 대책 없는 슬픔과 약동에 관해 쓴다고 대답한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봄이 오는 게 아니듯이 무슨 이유가 있어 슬프거나 힘이 나는 게 아니다. 원래 인생의 80%는 슬픔이고, 20%는 약동이 아닌가 한다. 그 사이 어딘가에 우리의 삶이 있다. 그리고 그 삶이 보일 때가 바로 내가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순간이자 음악을 만드는 순간이다.”

배병우 사진가
자연은 아름다움을 초월한다

“아름다움의 실체는 나도 모른다. 모르긴 모르되 나는 아름다움이라고 느껴지는 걸 자연 속에서 30년 이상 찍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했는데 중국에서 노벨상을 받은 작가 가오싱 젠은 20세기 이후에 아름다움이 죽었다고 하더라. 도대체 왜 근세기에 아름다움이 죽었을까.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욕심을 내 자기 공간을 자연 속에 과도하게 확장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뉴칼레도니아에 소나무를 찍으러 다녀왔다. 거기서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자연은 아름다움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서울 안에서는 창덕궁 뒤의 비원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나. 가장 작은 공간을 사람이 거주하고 자연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을 찍는다.

미(美)의 아이콘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30년 전, 소나무를 찍을 때는 유럽 사람들이 나를 비웃었다. 지나간 낭만주의를 한다는 이유다. 이제는 나를 낭만주의 화가 ‘캐스퍼 데이비드 프레드리히’라며 칭찬한다. 지구온난화가 심화되니까 자연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 것이다. 한 시대의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그 시대의 유행과 다름없지 않을까.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제주도다. 소나무는 우리 정체성이란 문제 때문에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한 거지만 나는 태생적으로 바다 풍경을 더 좋아한다. 제주 ‘삼다(三多)’의 아름다움을 찍고 있다. 아직 사람을 본격적으로 다뤄본 적이 없는데 가장 여성스러운 자연이 제주도 같다. 제주 ‘오름’은 제주여자의 모습이다. 최근 ‘세계 7대 자연경관’에 제주도를 넣자고 한다. 부끄럽다. 너무 많은 자연을 훼손시켜 놓고 7대 경관이라고 얘기한다. 예전에는 제주 우도 백사장에 가보면 발목·무릎까지 모래에 푹 빠졌다. 자연 상태 그대로 남아 있었다. 뉴칼레도니아 섬이 예전 제주 같더라. 나는 그런 자연 상태가 남겨진 게 더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김현자 무용가
변화해 다시 생기를 얻는 것은 아름답다

“나는 평생을 몸으로 말해왔다. 어릴 때부터 전통무용, 현대무용을 익힌 내게 춤은 생각과 표현의 도구였다. 한데 내가 배운 무용들은 모두 ‘만들어진 춤’이었다. 난 인위적이고 장식적인 몸부림이 싫었다. 지금까지 하던 무의미한 움직임을 배제하고 ‘나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춤’을 찾고 싶었다. 30년 동안 몸에 익혀온 것들을 모두 버렸다. 진정성이 없는 움직임들은 다 내려놨다. 춤을 일절 추지 않고 움막을 찾아 다니며 몇 년씩 호흡 연습을 했다. 내 안의 에너지를 다스리는 수련을 했다. 오랜 시간 나는 진실한 움직임을 찾아 몸부림쳤다.

무의미해 보이던 시간들이 지나고 내 깨달음은 ‘생(生)과 사(死)’에 이르렀다. 살아있음. 생, 또 생, 생하고 생하는 것. 살아있는 것은 변화하고 순환한다. 그래서 아름답다. 변화하지 않으면 고착화하는 것이고 고착화는 ‘죽음’이라는 단어로 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이미 죽은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느꼈다.

생(生)춤을 추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정형화된 움직임을 버리고 내 안의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나만의 춤이다. 1992년 고(故) 백남준 선생과 함께 한 공연에서는 변화와 순환을 가장 잘 대변하는 ‘얼음’을 이용했다. 정해진 움직임은 없었다. 얇은 명주옷을 입고 대나무 평상에 앉아 천장에 걸린 얼음이 녹아 옷에 탁 떨어져 닿는 순간 내 몸이 느끼는 작은 물방울의 질량과 차가움, 명주옷이 바르르 떨리는 느낌을 그대로 표현했다. 최초로 물방울이 내 몸에 닿는 순간 내 춤은 시작됐다. 내 감정대로, 얼음의 변화를 느끼는 대로 움직였다. 나는 거기 그렇게 살아있었다. 내 춤에 대해 무용계가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92년의 작품(얼음)을 하고 나니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변화하는 것만이 진실로 아름답고, 변화함으로 해서 다시 생기를 얻는 것은 아름답다.”

김병종 화가
선 속의 아름다운 곡선, 붓이 아름다움

“3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지금의 아내에게 붓 한 자루를 앞에 놓고 맞절을 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하자고 말한 적이 있다. 세월이 흘러 내 붓은 그 옛날 아름다웠던 여학생과 함께 까슬해졌다. 붓은 나와 평생을 함께해온 조강지처이자 아름다움이다. 젊은 시절엔 누군가 붓으로 무덤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지식인의 호사라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나도 그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

붓은 단순한 그림의 도구가 아니다. 모필(毛筆)을 쓰다 보면 내 몸과 마음의 상태가 여과 없이 글씨와 그림에 드러나는 것을 느낀다. 물론 그 묘한 교감이 만들기 위해서는 만만찮은 시간이 필요하다. 모필은 서구의 재료와 달리 매우 부드럽기 때문에 손에 익히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손에 익으면 마치 우리 몸에 뼈가 살아 움직임을 만들듯이 선 속에서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낸다. 붓은 내 그림을 비롯해 내 삶의 아름다움이라고 불릴 만한 많은 부분을 실현시켰다. 붓 한 자루에 의탁해 30년의 시간을 지내오면서 문방사우와의 사귐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이 아닌 사물에 이토록 애정을 느낀 적이 없다. 나의 아름다움, 내 붓으로도 필총(筆塚)을 만들까보다.”

김혜순 시인
마음이 되고 연주가 되는 귀, 아름답다

“시인은 말이 그친 곳에서 쓴다. 말할 줄 모르는 두 귀로 말 아닌 말을 쓴다. 귀가 하는 말, 그것이 시다. 귀에 비해 우리는 눈으로 대상을 재단하거나 판단하거나 소유한다. 한데 시인에게 귀는 몸의 축소판이자 몸 자체다. 시인은 귓구멍처럼 텅 빈 자이지만 귀처럼 열려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귀는 어두운 방이다. 과거의 우물이다. 이 깊은 어두움이 가득 차 있는 곳에 대한 몰입이 바로 귀가 하는 말, 시 쓰기다.

누구나 일인 방송국처럼 떠들어대는 세상이다. 누구의 귀가 열려있는지도 모른 채 우선 말부터 해본다. 눈을 뜨고 다시 감을 때까지 우리의 귀는 쉬는 법이 없다. 사방에 가득 찬 소리의 고문에 시달린다. 도시의 기계음, 지하철의 소음, 전화기를 집어 들고 쉴 새 없이 아우성치는 수많은 입…. 살을 벗고 벌건 눈을 번뜩이며 육박해 들어오는 소리들 앞에 우리의 귀는 편집 기능을 잃었다. 눈은 감을 수 있지만 귀는 닫을 수 없다. 나는 저절로 운다.

귀, 검은 구멍은 일평생 들어온 소리를 내부에 간직한다. 입을 다물고 부르던 노래들을 간직하고 있다. 인간을 만들고 남은 뼈들을 주워다가 장인의 골방에서 세공했을 법한 작은 것이 크고 깊은 소리를 담아낸다. 그 작은 주머니 속에 집채보다 큰 소리가 깃든다. 약한 것 속에 엄청난 소리들이 깃든다. 그래서 귀는 마음이 된다. 저 깊은 곳에서 귀가 연주를 시작한다. 시인이 그것을 받아 적는다. 이 발화의 순간들이 있기에 귀는 아름답다.”

(김 시인은 시 낭독처럼 산문시 같은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렸다. 떨리는 목소리로. 홀은 시인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300개의 귀가 그의 말을 담았다.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감고 귀를 연 이들도 있었다. 그 순간 그곳의 모든 귀는 아름다웠다.)

정두수 화학자
자연이 보여주는 ‘비대칭’이 아름답다

“우리는 ‘아름다움’ 하면 거울을 떠올린다. ‘좌우 대칭’이 미인의 기준으로 떠오르면서 좌우가 똑같은 거울의 대칭을 연상하는 탓이다. 하지만 우리의 생명을 좌지우지 하는 중요한 물질들은 한쪽 구조로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자연계가 보여주는 ‘비대칭’의 모습이다. 단백질을 이루는 기본 단위인 아미노산은 모두 오른쪽으로 감겨 올라가는 나사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특성을 과학 용어로는 생물의 ‘단일 손대칭성’(호모 카이럴리티)이라고 한다.

자연이 아닌 사람이 만든 것은 거의 예외 없이 분자식은 같지만 화학적·물리적 성질이 다른 화합물이 동시에 나타난다. 1950년대에서 60년대까지 임산부들의 입덧 억제제로 팔린 ‘탈리도마이드(Thaildomide)’라는 약이 있다. 모양은 똑같은데 한쪽은 약효를 내지만 다른 쪽은 기형아를 만드는 부작용을 일으킨다. 본래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안정되고 행복한 상태인데 인간이 억지로 둘을 섞어놓으니 큰일들이 벌어진다고 해야 할까. 나는 결국 자연이 보여주는 비대칭의 상태가 아름다움이자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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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