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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Focus] 35년 만에 신곡 내놓은 ‘가수 이장희’





음악은 종종 추억의 대명사다. 소리는, 특히 대중음악 멜로디는 과거의 특정 시점을 드세게 환기시킨다. 가수 이장희(64)는 그런 추억의 소리였다. 그 소리는 1970년대 초입 아리따운 포크 멜로디로 나타났는데, 75년 말 대마초 파동에 휩싸여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서른다섯 해가 흘렀다. 지난해 세시봉 열풍과 더불어 이장희의 소리가 다시 돌아왔다. 트레이드마크였던 콧수염은 밀어버렸지만, 그의 멜로디는 여전히 아리따웠다. “음악을 다시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는 그는 내친김에 신곡도 발표했다. 7년째 거주하고 있는 울릉도를 노래한 ‘울릉도는 나의 천국’이다. 이장희의 소리는 또다시 대중의 마음을 훔칠 수 있을까.

글=정강현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한동안 뜸했었지

그는 음악을 딱 끊었었다. 75년 대마초 파동을 “노래로 좌절했던 때”라고 설명했다. 파동에 휩싸인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사업가로 변신했다. LA에 ‘라디오 코리아’를 세워 꽤 잘나가는 사업체로 일구었다. 그 30여 년간 음악과는 담을 쌓았다.

●35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르셨는데요.
 “음악은 35년간 완전히 잊어버렸던 삶이에요. 내가 한때 가수였다는 걸 속으로야 알지만 음악을 다시 할 거라곤 상상도 안 해봤어요. 울릉도에서 조원익(‘동방의 빛’ 출신 베이스 주자)과 4년을 같이 살았는데 기타 한 번 잡아본 적 없었거든요. 잃어버린 고향을 찾은 것처럼 따뜻한 기분이 들어요.”

●대마초 파동에 휩싸였다 해도 음악을 굳이 그만둬야만 했을까요.
 “영 다른 걸 한번 해보자 싶었어요. 노래 때문에 좌절했으니 의식적으로 ‘노래는 다시 하지 말자’고 저를 몰아갔던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벽돌을 10년 쌓은 사람과 그림을 10년 그린 사람의 미학적 성취는 똑같다고 보거든요. 다른 일을 하더라도 음악을 할 때와 똑같은 정열을 담아내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맨 마지막으로 곡을 쓴 게 언제인가요.
 “미국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곡을 썼었죠. 아마 서른다섯 살 때였을 거예요.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였죠. 사랑하는 아내도 떠나고 홀로 남고 보니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울릉도는 나의 천국

 그가 35년 만에 내놓은 신곡은 ‘울릉도는 나의 천국’이다. 그를 만나기로 한 날, 그는 서울 강남의 한 소극장에서 이 노래를 직접 불러줬다(※동영상 참조). 몸을 들썩이고 기타를 두드리며 이렇게 노래했다. ‘나 죽으면 울릉도로 보내주오, 나 죽으면 울릉도에 묻어주오….’

●울릉도 노래를 발표한 이유가 있나요.
 “방송에 나가서 울릉도를 위한 노래를 만들겠다고 말했던 게 지켜야 하는 약속이 돼버렸죠. 그러잖아도 7~8년 전부터 울릉도 노래를 하나 만들고 싶긴 했어요. 가사가 안 나와서 시간이 오래 걸렸던 거죠. 저는 작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거든요. 곡이야 두세 시간이면 나오지만 노랫말을 짓는 게 그렇게 힘들더라고요.”

●신곡의 가사는 어떻게 떠올리신 건가요.
 “제가 16년간 기른 개가 있어요. 라디오 코리아 맨 처음 시작할 때부터 같이 있던 개인데, 그래서 이름이 라디오 코리아를 줄여서 ‘라코’였어요. 제가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울릉도로 들어올 때 라코도 함께 데려왔거든요. 그런데 4년 전에 죽고 말았어요. 개를 울릉도에 묻어줬는데 그 생각이 문득 나더라고요. ‘아, 울릉도에 묻히면 행복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나 죽으면 울릉도에 묻어주오’라는 가사가 떠올랐죠.”

●울릉도의 매력이 대체 뭔가요.
 “제가 워낙 자연을 좋아해요. 예전엔 막연히 하와이에서 말년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하와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울릉도의 아름다움에 반해버렸죠. 동해 한가운데 우뚝 솟아서 산과 물이 어우러진 천국과 같은 곳이에요.”

그건 너

 이장희는 맨 처음 선후배 가수들의 곡을 쓰는 작곡가로 활동했다. 번안 가요가 인기를 끌던 시절 “이제는 우리도 우리가 직접 만든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겠냐”며 지인들에게 곡을 건넸고, 훗날 가수로도 데뷔했다. 그 시절 ‘싱어 송라이터’란 명찰을 달고 있던 몇 안 되는 뮤지션이었다.

●노래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요.
 “노래는 대학(연세대 생물학과) 때 (윤)형주를 만나서 처음 시작했어요. 라이너스(한국 최초의 포크 트리오)를 만들어 더러 노래도 했었는데, 우선은 작곡하는 게 주된 일이었죠. 그때 이미 스타로 자리를 굳혔던 (송)창식이, 형주, (김)세환이한테 곡을 써서 줬죠. (‘비의 나그네’(윤형주), ‘애인’(송창식)’, ‘좋은 걸 어떡해’(김세환) 등이 그가 작곡한 노래다.) 그때 훗날 라디오 DJ로 유명해진 이종환씨가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나더러 노래도 같이 해보라고 권해서 ‘그 애와 나랑은’으로 데뷔하게 됐어요.”

●사실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라고 할 순 없는데요.
 “하하. (조)영남이 형이 나더러 절대 노래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저는 그저 제 기분에 의지해서 노래를 불렀어요. 어떤 기분이 느껴지면 가사를 쓰고, 그 다음 곡을 쓰죠. 노래는 그 기분을 전달하는 거예요.”

●방송에서 세시봉 친구들에게 쓴 편지가 화제가 됐었는데요.
 “영남이 형, 형주, 창식이, 세환이가 ‘세시봉’ 열풍을 불러일으키면서 저한테도 섭외가 들어왔어요. 계속 출연을 거절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이제 다 예순이 넘었는데 언제 또 같이 방송에서 무대를 꾸밀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축하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어요. 한 친구를 떠올리면 그 친구와 얽힌 옛날 추억이 밀려와서 편지 쓰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어요. 편지도 사실 굉장히 길었는데, 방송용으로 요약해서 읽었죠. 으하하하.”

●그 친구들을 짧은 문장으로 표현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사람들이 변하지 않고 다들 40년 전과 똑같다는 점이 참 기분이 좋아요. 글쎄…. 그 좋은 친구들을 어떻게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음…. 영남이 형은 여전히 실없는 소리 즐겨 하는 유쾌한 사람이고, 형주는 입담 좋은 든든한 친구, 창식이는 아직도 알지 못하는 소리를 종종 늘어놓는 재주꾼이죠. 세환이는 건강한 소년 같은 동생이고요. 하하.”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

 이장희는 올해로 예순넷이다. 74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 때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란 곡을 썼다. 이런 노래다.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 난 그땐 어떤 사람일까. 그때도 사랑하는 건 나의 아내, 내 아내뿐일까. 가끔은 울기도 하고 그때도 꿈을 꿀 수 있을까.’

●그 노래는 어떻게 만들게 되셨어요.
 “제가 지난해 ‘무릎팍 도사’에서 불러서 화제가 됐지만 실은 37년 전에 만든 노래예요. 그때 고려대 축제에서 저를 초대했는데, 만날 똑같은 노래를 하고 싶진 않은 거예요. 그래서 축제 하루 전날 새로 곡을 썼죠. 아마 그 노래를 부른 무대는 그때 고대 축제가 유일했을 거예요. 소품 같은 노래라 종종 혼자 부르긴 했어도….(※그는 인터뷰에 앞서 취재진 앞에서 이 노래도 불렀다. 동영상 참조)

●이제 육십하고 한 살은 훌쩍 넘기셨는데, 노랫말대로 여전히 꿈을 꾸고 계신가요.
 “네, 그런 것 같아요. 지금도 가끔 울기도 하고 꿈을 꾸고 있죠. 예순을 넘어가니까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낸 사내의 안온함이 느껴져요. 하지만 한편으론 내가 어쩔 도리가 없는 적막함과 쓸쓸함도 함께 몰려오죠. 그런 자연스러운 감성을 노래하려고요. 예순을 넘긴 이장희의 노래에선 인생이 느껴질 거라고 생각해요. 앨범 작업도 해볼까 꿈을 꾸고 있고요, 가을께는 방송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 계획이에요. 여전히 꿈이 많죠? 하하.”

●이장희의 예순넷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이었나요. 사랑? 돈? 음악?
 “바로 저 자신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누구보다도 저는 제 자신을 사랑합니다. 왜냐고요? 제가 죽으면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죠. 저 세종로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지만, 그렇게 훌륭한 분도 누가 매일 기억합니까. 우리는 다들 그렇게 잊혀지고 사라져가죠. 딱 한 번 사는 인생이기 때문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제 인생이 소중하니까 다른 사람의 인생도 소중하다는 걸 잘 알죠. 살아있는 동안 울릉군민으로 살아가면서 울릉도도 노래하고, 인생도 노래하면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좋은 기분을 나눠주고 싶습니다.”


j칵테일 >> ‘콧수염’ 대신 ‘민머리’





이장희란 이름을 떠올리면 ‘콧수염’이 슬그머니 그려진다. 1970년대 그는 콧수염과 오토바이, 가죽점퍼 등으로 대표되는 반항하는 청춘의 표상이었다. 얼핏 불량해 보이는 외모 때문이었을까. 그가 만든 노래들은 유독 금지곡 목록에 자주 이름을 올렸다. ‘그건 너’는 남에게 책임을 떠넘긴다는 이유로, ‘불 꺼진 창’은 창 안에 남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가사가 불륜을 묘사하고 있다는 이유로 금지됐다.

 사실 그가 콧수염을 기른 건 청춘의 표상이 되겠다는 야심 찬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대학 시절 친구와 질펀하게 싸움이 붙었는데 그때 생긴 흉터를 가리려고 수염을 길렀단다. 하지만 75년 말 가수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건너간 뒤엔 생각이 달라졌다. “콧수염만 봐도 이장희를 알아보니 미국에서도 어딜 다니기가 불편했을 정도”라고 했다.

 그래서 마흔이 되던 해에 수염을 싹 밀었다. 육십이 되던 해엔 머리마저 깨끗이 정리했다. 덕분에 말끔한 민머리 노신사로 변신했지만, “요즘엔 사람들이 더 많이 알아본다”고 했다. 그의 울릉도 집까지 찾아와 대문을 두드리는 팬들이 많단다. ‘콧수염’ 이장희는 추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민머리’ 이장희의 새로운 멜로디를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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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