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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Insight] 존 다우어 “일본 젊은층, 원전 사태로 정치 무관심 반성”

“21세기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사를 돌아봐야 한다.”

 일본 근·현대사,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일본사의 세계적 권위자인 존 다우어(73)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역사학과 명예교수는 일본 역사에 대한 이해가 일본의 앞날을 예견하는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 한국 등 주변국에 일본이 행한 잘못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도 역사에 대한 준엄한 인식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동일본 대지진의 폐허 위에서 다시 태어나는 우리 이웃, 일본의 내일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 길을 묻기 위해 j는 다우어 교수의 MIT 연구실을 노크했다. 위스콘신대를 거쳐 MIT에서 20년간 교수로 재직한 그는 대지진 이후 훨씬 바빠진 모습이었다. 인터뷰 중에도 CNN·뉴욕 타임스 등 미 주요 매체의 인터뷰 요청 전화가 끊이질 않았다.

보스턴=김승렬 객원기자 (전 중앙일보 이코노미스트 기자)







존 다우어 교수는 2차대전 이후 일본 사회와 일본인들의 행태를 분석한 『패배를 껴안고(Embracing Defeat)』를 펴내 2000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일본이 제국주의 야망을 불태운 1920~40년대를 지나 2차대전 패배의 잿더미에서 세계 강대국으로 재기하는 과정을 ‘패배와 고통 껴안기’라는 말로 그는 요약했다.

●일본은 패전을 어떻게 딛고 일어섰나.

 “일본의 재기는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1945~52년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면서 군국주의 일소와 민주화를 위한 개혁정책이 시작된다. 말하자면 자발적인 개혁이 아닌 ‘강요된 개혁’이었다. 이 당시 일본은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미 점령군은 천황의 신격화를 폐지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입헌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점령군이 모든 정치·사회 활동을 통제하고 검열하는 제한적 민주주의의 시대였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일본 경제는 ‘전쟁 특수’를 맞게 되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경제 발전이 시작됐다.”

●점령군의 정책에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점령군은 민주주의를 진작시키는 임무를 띠고 일본에 왔다. 하지만 투명성이 없는 ‘전시 관료’ 체제로 일본을 통치했다. 결국 그 관료주의의 유산이 주로 경제 분야에 남게 되어 오늘까지 폐해를 낳게 됐다.”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소홀한 것도 그것의 영향이 있나.

 “그렇다. 일본이 철저한 사죄를 통해 과거사를 매듭짓지 못한 데는 패전 일본을 점령했던 미국의 책임도 있다. 한국 등 주변국에 사죄할 경우 이에 따른 배상금 지불 우려 때문에 미·일 모두 사죄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또 미온적인 전범재판을 통해 많은 군국주의자에게 면죄부가 주어졌고, ‘신민의식’의 정점에 있던 천황제를 존속시키면서 민주주의를 도입한 것도 일본(민주주의)에 태생적인 한계를 가져왔다.”

●천황제가 민주주의의 한계를 초래했다는 건 무슨 뜻인가.

 “천황은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이데올로기 주입의 심장이었다. 진주만 기습 4개월 전 출판된 소책자 『신민(臣民)의 길』은 일본의 국체를 ‘신민이 사사로움을 버리고 천황에게 충성을 바침으로써 하늘과 땅과 일체인 제위를 보필하는 신정(新政)’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나중에 천황은 진주만 기습에 대해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다며 책임을 면했다.”

●일본 국민들 역시 군국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의 피해자라는 시각도 있다.

 “물론이다. 그들도 피해자다. 하지만 전쟁과 패전은 일본인들이 인간성과 인격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래된 면이 있다. 일본인들이 스스로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을 기르지 못했기 때문에 군국주의나 초국가주의의 도래를 막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쟁 책임은 일본인 전체가 져야 하며, 세계를 향해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 교과서, 독도 영유권 문제가 여전히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다.

 “그것은 일본의 극우파·신민족주의자들의 입김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대지진을 계기로 한국·중국 등 그동안 일본과 갈등을 빚었던 나라들과 협력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이 기회를 이용해 상호관계의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일본은 큰 재난을 많이 겪었다. 그것이 일본의 힘이 됐을까.

 “무엇보다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이 큰 재앙이었다. 집집마다 점심 준비가 한창이던 정오 무렵 발생한 지진으로 시내 곳곳에 화재가 일어났다. 도쿄·요코하마 지역은 말 그대로 ‘불바다’가 됐다. 사망자는 14만 명에 달했고 국부(國富)의 40%가 재로 변했다. 이 당시 촬영한 사진을 정리하던 도서관 사서들이 이를 2차대전 중에 찍은 것으로 착각해 날짜를 잘못 기록한 것이 많을 정도였다. 도시들이 마치 폭격을 맞은 것처럼 폐허가 됐으니까. 하지만 위기는 동시에 새로운 기회가 됐다. 재건에 나선 일본 경제는 건설 특수를 맞게 된다. 도쿄에 지하철이 처음으로 건설되고, 곳곳에 공원이 들어서는 등 새 모습으로 단장됐다. 백화점 건설 붐이 일어나 도쿄의 긴자 등에 쇼핑 문화가 생기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도로·철도 등 교통수단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경제 발전의 기초도 닦았다. 하지만 일본은 이후 군벌의 등장과 제국주의·식민주의 정책으로 결국 파국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번 대지진 때 침착하게 대응하는 일본인들을 보며 세계가 놀랐다.

 “‘인내’가 일본인 특유의 국민성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 과연 그럴까? 일본이 항상 이처럼 절제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1923년 간토 대지진을 봐라. 당시 죄 없는 조선인들을 약탈자·방화범으로 몰고,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7000명이 넘는 조선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장본인들이 아닌가. 국민성을 논하는 것에는 함정이 많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수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원전에 들어간 기술자들에 대해 ‘현대판 사무라이 정신’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의미한 얘기다. 위험에 빠진 조국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용감한 시민들은 어느 나라에든 있지 않았나.”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자부하던 일본도 녹아 내리는 원전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대지진과 이로 인한 원전사고 사태에서 일본 정부의 대응은 그야말로 ‘무능’ 일색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번 일은 많은 일본 국민에게 자신들이 원전 문제는 물론 정치에 무관심했음을 반성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많은 일본 젊은이가 시민운동단체로 모여들고 있다. 이를 잘 활용하면 참여민주주의가 성숙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피폭 국가로 핵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일본이 핵 의존도를 높인 이유는.

 “핵 발전 초기에는 반대 시위도 자주 있었다. 하지만 핵 발전에 대한 인식 변화의 전환점이 된 것은 73년 중동 산유국의 원유 감산과 수출 금지로 시작된 오일 쇼크였다. 석유를 전량 해외에 의존해야 하는 일본은 전력 생산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이로 인해 원자력 발전 비중을 높이는 정책에 대한 국민의 반대가 크게 줄었다.”

 일본 정부는 50년대부터 원자력의 안전성을 홍보하는 데 주력했다. 60~70년대 고도성장기에 접어들면서 원자력 발전의 필요성은 더욱 확고해졌다. 만화영화 ‘우주소년 아톰’이 일본 가정의 안방을 휘저었던 것도 60년대다. 로봇 소년 아톰은 ‘10만 마력’의 원자력 모터로 하늘을 난다. 원자력은 ‘꿈의 에너지’로 그려진다. 일본은 최근까지 54개의 원자로가 전체 전력의 30%를 생산할 만큼 원자력이 큰 비중을 차지해왔다. 일본 정부는 이를 2030년까지 5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었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태로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안전신화의 붕괴에 일본인 스스로도 충격을 받고 있다.

 “2차대전 패전 후 ‘허탈’을 의미하는 ‘교다쓰’라는 말이 일본사회 전체를 대변하는 신조어가 될 만큼 일본은 충격을 받았었다.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야마토 신민’이라는 우월성이 강조되다가 패전으로 하루 아침에 ‘4류 국민’으로 전락하면서 많은 일본인이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졌었다. 정도는 덜하지만 이번 대지진의 충격도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상당한 상처를 안겨줄 것이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한국과 중국에서 급파된 구조대원들.

●상처를 빠르게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주는 힘은 뭘까. 바로 인적 자원의 질이다. 역사가 이를 웅변한다. 물리적인 피해가 얼마나 큰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일본이 2차대전의 폐허를 딛고 재건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기술자들 덕분이다. 1930~40년대 일본의 엔지니어 수는 10배로 늘었다. 이들이 축적한 기술은 전후 경제 회복의 주춧돌이 됐다. 한 국가를 재건하는 것은 정부의 정책이 아니다. 사라진 삶의 터전을 다시 일구기 위해 절망을 무릅쓰고 안간힘을 쓰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재건의 역사를 만드는 주역이다. 이들이 그 과정을 얼마나 창조적으로 이끌어 가느냐에 따라 국가적 성패가 결정된다. 이번 대지진 복구도 마찬가지다. 물리적 복구뿐 아니라 정치·경제 시스템에서 창조적 변화가 아래로부터 일어나야 한다. 그게 성공의 열쇠다.”


이라크전 필독서, 다우어 교수 『패배를 껴안고』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테러 공격을 당한 뒤 미 언론은 일제히 “이날은 미국에 영원히 오욕의 날(day of infamy)로 기억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표현은 1941년 12월 일본의 미 진주만 공습 다음 날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국민 성명 때 사용했던 문장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9월 11일 일기에 “21세기판 진주만 공습이 일어났다”고 적었다. 일본에 진주만 공격을 받은 뒤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했듯 부시 대통령도 ‘테러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제국주의 일본의 삼국을 ‘추축국(axis)’이라고 부른 것처럼 부시도 이라크·이란·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명명하며 비난했다. 9·11 사태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자리를 ‘그라운드 제로’라 부르는 것도 원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핵폭탄을 맞은 중심지를 일컫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테러리스트의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으로 돌진한 것에 대해 ‘가미카제’식 공격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으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독립전쟁 이후 미국을 직접 공격한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다. 그만큼 미국인들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져 있다. 그래선지 존 다우어 교수가 쓴 일본 역사서 『패배를 껴안고』는 이라크전을 치를 당시 부시 대통령 참모진의 필독서였다. 다우어 교수가 미국의 이라크전쟁에 대해 분명한 반대 입장을 보였음에도 말이다.

●미국인들이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가.

 “그렇다. 그래서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미국이 9·11 사태를 설명하는 하나의 ‘코드’로 다시 쓰였다. 부시 행정부는 이 같은 비유법을 대국민 홍보에 이용했고, 이라크 침공 내내 사용했다.”

●일본과 이라크는 어떤 차이점이 있나.

 “일본 점령 경험이 이라크에서도 통할 것이라고 생각한 게 부시 정부의 오판이다. 우선 이라크는 일본과 같은 문명사회가 아니다. 또 미국의 일본 점령은 전쟁의 승자에게 주어진 권리로 세계가 공인했다. 하지만 미국의 이라크 점령이 정당한 것이냐에 대해선 많은 논란이 있다. 더욱이 이라크는 시아·수니파 등으로 나뉘어 있어 일본처럼 단기간에 통합하기 힘들다.”

●이라크전쟁의 끝은 어디라고 보나.

 “종착점이 어디일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시작한 전쟁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때 해당국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 점만큼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의 일본 점령 당시와 닮은꼴이다.”


j칵테일 >> 일본에 쓴소리하다 연구비 끊기기도





존 다우어 교수와 일본의 인연은 20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애머스트 대학을 졸업한 뒤 여행 삼아 들른 일본의 매력에 푹 빠졌다. 일본에 주저앉아 3년을 살았다. 일본에서 영어강사, 출판 관련 일을 하다 미국에 돌아와 하버드대학원에 진학, 역사학 및 극동언어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결혼은 일본에서 만난 일본인 야쓰코 여사와 했다. 일본 전문가이긴 하지만 일본 편만 드는 학자는 결코 아니다. 일본에 쓴소리를 하다 일본으로부터의 연구비 지원이 끊겨 곤란을 겪은 적도 여러 번이다.

 1960년대 말에는 미국의 베트남전에 반대, 동양사 전공의 소장파 학자들을 규합해 반전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원자폭탄의 참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지옥불: 히로시마로부터의 여행’을 공동 제작해 86년 아카데미상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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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