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5·18 관련 말 한 마디, 메모지 한 장에도 매달렸다”





세계기록유산 등재 이끈 안종철 실무추진단장





“옛 전남도청 앞에서 연설하던 박관현(1980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 82년 10월 교도소 수감 중 타계)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안종철(56·사진) 5·18기록물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 등재 실무추진단장의 말이다.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는 유네스코 등재 순간, 그는 박관현을 떠올렸다. 1980년 5월 ‘살아 남았다’는 미안함은 그를 항상 짓눌러 왔다. 2009년 말부터 5·18 기록물의 유네스코 등재에 매달린 이유다. 문건·사진·영상·증언 등 기록물 수집에서부터 50쪽 분량의 신청서 작성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었다. 그는 “이번 등재는 5·18이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걸 국제적으로 인정 받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치학 박사인 그는 광주시 5·18 전문위원과 5·18 민주화운동 사료편찬위원, 5·18 기념재단 전문위원 등을 지냈으며, 현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 유네스코 제10차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 참석차 22일부터 영국 맨체스터를 방문 중인 안 단장과 전화 인터뷰를 했다.



 -유네스코 등재 의미는.



 “5·18을 왜곡·폄훼 하려는 세력들에 맞서 민주화운동으로서 국제적인 공인을 받았다는 게 중요하다. 일부 보수단체들은 최근 유네스코 파리본부에 ‘광주사태, 함부로 등재 말라’는 성명을 보내기도 했다. 관련 자료들을 사장시키지 않고 연구·교육에 활용할 수 있게 된 것도 의미가 있다.”



 -5·18 기록물에 관심 갖게 된 계기는.



 “1988년 송기숙 전 전남대 교수가 현대사사료연구소를 만들었다. 그 때 5·18과 관련한 생생한 증언과 자료를 수집했다. 이후 전문위원과 편찬위원 등을 거치면서 말 한마디, 사소한 메모지 한 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 앞으로 기록물을 위한 아카이브를 만들어 민주주의 교육에 활용할 계획이다.”



 -어떤 점이 유네스코 자문위원들을 움직였다고 생각하나.



 “광주에선 5·18 문제 해결을 위해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명예회복 ▶보상 ▶기념사업이라는 5대 원칙이 정립돼 모두 관철됐다. 세계에서 등재를 신청한 84건 중 59건이 심사소위원회를 통과했는데, 진상규명에서부터 기념사업까지 이뤄졌다는 게 광주의 강점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병원 기록 등 모든 객관적 자료도 확보됐다. 또 광주는 아시아 최초로 군사독재에 항거해 민주화를 이끈 모델 케이스란 점도 어필했다.”



 -소회를 밝혀달라.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1980년 5월(당시 전남대 4학년) 살아남은 자로서 무거운 짐을 조금 덜었다. 이번 일로 생존자의 도리를 100분의 1 정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유네스코 등재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나.



 “대학을 같이 다녔던 박관현이 떠올랐다. 옛 전남도청 앞과 전남대 도서관 앞에서 연설하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는 당시 군대에 다녀온 상황이라 다른 길을 갔다. 연구하는 학자로서 마음의 빚을 갚았다는 생각이다.”



유지호 기자 , 사진=[무등일보 제공]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