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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22) JP와의 바둑대결 





JP 연금 시절, 청구동에 가면 말없이 바둑만 뒀다



JP(김종필)와 신성일은 1970년대 초 바둑친구였다. 사진은 2001년 4월 대전에서 열린 제2회 운정배 바둑대회에서 훈수를 하고 있는 JP. [중앙포토]





최근 JP(김종필)가 5·16 반세기를 맞아 언론에 당시 이야기를 소상하게 털어놓았다. 중앙일보에서 JP의 모습을 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1960년대부터 교분을 맺어왔지만 가택연금 시절의 JP가 가장 인상에 남는다.



 60년대 청춘스타로 떠오른 나는 정부 공식 행사에서 청와대 실력자와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혔다. 게다가 연예계 부동의 납세 1위였기에 이들의 관리 대상이기도 했다. 그 중에 가족 같은 친분으로 JP의 집에도 자유롭게 드나들게 됐다. 청구동(현 신당동) 자택에 가면 김진봉 수석비서관을 비롯해 5~6명이 JP를 보필했다. 백색전화기만 5~6대가 비치돼 있었다.



 5·16을 기획·주도한 JP는 70년 전후로 3선 개헌 및 유신헌법을 지지하지 않는 입장에 서는 바람에 박정희 정권과 갈등을 빚었다. 박정희는 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김대중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JP는 3선 개헌을 하고 대통령 선거에 나선 박정희를 견제한 국민들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김용태·양순직 의원, 쌍용그룹 김성곤 창업주 등도 JP와 뜻을 같이했던 인물이다. 서울신문사 사장 출신으로 6·7대 공화당 국회의원이 된 양 의원의 경우, 69년 3선 개헌 반대를 주도하며 당에서 제명됐다. 김성곤 창업주의 트레이드 마크는 콧수염이었는데, 그가 남산에 끌려가 콧수염이 뽑혔다는 말까지 들려왔다. 서슬 퍼런 시대였다.



 71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JP는 청구동 자택에 가택 연금된 상태였다. 나는 빨강 무스탕을 몰고 청구동을 방문하곤 했다. JP의 집에 가까이 가면 검정 양복을 입은 기관원이 길 입구에, 또 다른 사람이 집 앞 모퉁이 건너에 서 있었다. 집 앞 도로는 좁은 일방통행로였는데, 지나가는 차가 있을 턱이 없었다. 마음 편하게 무스탕을 집 앞에 대고 내렸다. 일거수일투족이 속속들이 윗선에 보고되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는 박 정권이나 JP와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관원들에게 손으로 아는 체 하면, 그 쪽에선 목례로 화답했다.



 벨을 누르면 김진봉 수석비서관이 문을 열어주었다. 절차는 아주 간편했다. 당시 연금된 JP와 부인 박영옥(박정희의 질녀) 여사를 감히 찾아갈 수 있는 배포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까만 양복을 입고 서 있는 사람을 보면 자동차 핸들을 꺾을 수밖에 없다.



 JP는 나를 ‘미스터 신’이라고 불렀고, 나는 깍듯하게 ‘총리님’이라고 호칭했다. 응접실에는 항상 바둑판이 놓여있었다. 우리의 바둑대결은 아주 특이했다. JP는 나를 보면 “바둑이나 두지”라며 아무 말없이 바둑판 앞에 앉았다. 제3자가 보았다면 ‘뭐 저런 사람들이 다 있나’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JP는 가만 앉아서도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뻔히 다 아는데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나 역시 JP에게 아쉬운 게 전혀 없었다. 너무 외롭게 사시니 인사차 간 것뿐이었다. 나 외에 방송작가인 김석야·조남사가 바둑을 두며 이심전심하는 JP의 객(客)이었다.



 내 바둑 실력은 11급, JP는 8급이었다. 두 점 접바둑을 두고도 JP에게 늘 졌다. JP와의 바둑대결은 푸근한 맛이 있었다. JP라는 인물의 성격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JP의 진면목을 발견한 건 몇 년 후였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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