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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분란민국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고등학교 시절 얘기다. 유신이 임박했던 그때에도 민주주의를 가르친다고 학생회장 직선제가 허용됐다. 우등생에 얼굴까지 받쳐주는 쟁쟁한 후보들이 나서 공약을 쏟아냈다. 필자가 열세를 만회한 건 그 공약 덕분이었다. 이웃 명문 여학교와 연합체육대회를 열겠다, 학년별로 미팅을 정례화하겠다는 제안에 유권자들이 깜빡 넘어갔다. 내친김에 한술 더 떴다. 그 여학교와 교류증진을 위해 아예 구름다리를 놓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줄잡아 500m 거리였다. 입시에 지친 젊은 영혼들의 환호 속에 교장과 훈육주임은 침묵해야 했다. 회장으로 수행한 일은 불량학생 선도, 등굣길 정문 규찰, 예술제 군기 잡기, 뭐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이었는데, 공약이행을 다그치거나 비난의 소리는 없었다. 다만 필자가 대학입시에 낙방한 것으로 응징받아야 했다.



 대통령 공약사업이 선을 보인 지 벌써 20여 년이 넘었다. 고교 회장의 공약(空約)은 청량제로 족하지만, 대통령의 공약(公約)은 5000만 국민과의 약속이자 미래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이웃 일본과 중국은 그 과감한 공약 덕분에 상상도 못 하는 사업들이 착착 추진되는 한국을 부러워한다. 고속철도와 신공항을 단기간에 완성하고, 인구 50만 도시를 뚝딱 세우고, 국책기관을 사방으로 흩뜨리는 대역사에 정치인들이 운명을 거는 일은 어느 나라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각 정권마다 100여 개씩, 김영삼 정권 이후 약 400여 개의 크고 작은 공약이 집행됐거나 집행 중이며, 차기 후보 캠프에서 또 100여 개를 쏟아낼 예정이다. 공약은 상상을 불허하는 기상천외한 것일수록 효과 만점이다. 세종시와 4대 강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기획이었다. 차기 캠프에서는 판을 휩쓸 더 충격적인 것들을 찾아 헤맬 터인데, 무상의료, 광주∼대구 고속철도, 두바이 같은 자유무역항, 명품아파트 200만 호, 시베리아종단철도 종착역 등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듯하다.



  그런데, 일단 표로 굳힌 공약을 이행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게 문제다. 폐기하면 공약(空約)남발, 배신정부로 찍히고, 하자니 천문학적 예산과 분란이 뒤따른다. 이명박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 10대 공약사업비만 195조원이 든다는 계산인데, 여기에 차기 정권 예상사업비 100조원가량을 더하면 대략 정부 1년 예산의 4분의 3 정도에 해당한다. 세계 어느 나라가 300조원을 대통령 공약사업에 쏟아붓고 있는가. 하루가 힘든 2000만 서민이 돈 없어 가슴 쥐어뜯는 게 오늘의 현실 아닌가. 그 돈은 1조원 자본금에 5조원 총자산을 가진 대기업 300여 개를 세울 수 있는 금액이다. 국민이 주인인 300여 개의 공기업을 만들어 각 시도에 호기 있게 나눠주면 어떨까. 50만 개의 알짜배기 일자리가 생기니 지역민도 환호할 것이고, 정치인끼리 다투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공약사업을 둘러싼 분란은 대한민국의 고질병이 되었다. 고속철도와 신공항은 이해갈등이 적은 사안이었다. 경부가도가 조선시대부터 존재했기에 초등학생이라도 대강 비슷한 노선을 그렸을 것이다. 그런데, 노 정권과 현 정권의 국책사업은 누구라도 고개를 들이밀 수 있는 엄청난 로또여서 지자체로서는 단념할 수가 없다. 공약사업은 조용한 민심을 들쑤시기 일쑤다. 옆 동네 경사 났는데, 배 안 아플 장사 있는가 말이다. 민심동향에 목매는 단체장들도 온몸을 던져 유치작전에 매달리는 결기를 보여줘야 한다. 행정도시 이전, 기업·혁신도시 선정을 두고 얼마나 시끄러운 날들을 보냈는가.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고, 기상천외한 공약이 선보일 내일도 그럴 것이다. 다 팔자소관으로 그냥저냥 사는 지역민을 들쑤셔 모두 뿔나게 만드는 ‘뿔난민국’, 지역지도층과 정치인들을 삭발·단식투쟁·시위행진으로 내몰아 전면적 분란을 부추기는 ‘분란민국’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총선·대선으로 지역싸움이 진정되기도 하지만, 여진이 강하게 남아 차기 정권을 궁지에 빠뜨린다. 노 정권의 기업혁신도시는 공정이 겨우 30% 남짓하고, 기분이 잡친 세종시는 뒷전이다. 과학비즈니스벨트는 차기 정권에서 애물단지가 될 소지도 있다. 캠프들이 개발 중인 비밀병기들을 검증할 방법이 없고, 2006년 시작된 매니페스토 운동도 별 효력이 없다면, 아예 대통령 공약을 예산규모로 제한하는 방법을 고려할 만하다. 분란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가령 공약사업 총규모를 30조원 이하로 규제하는 것 말이다. ‘대통령 4년 중임’ 개헌을 통해 정책 연속성과 책임성을 제고하는 것도 분란민국을 종결하는 좋은 방법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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