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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21) 눈물의 결단




1960년대 한국 영화산업을 이끌었던 신상옥 감독. 그가 세운 신필름은 제작 시스템, 장비와 시설, 전속 제도 등 모든 면에서 할리우드 시스템에 근접한 영화사였다. [중앙포토]


모든 일은 내가 저지르고, 해결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한 뒤의 결연함. 그런 마음으로 극동흥업의 영화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할 기회를 잡고자 했다. 영화사 측은 최종 결정을 재촉하는데, 막상 카드를 쥔 신상옥 감독은 홍콩 출장 중이었다. 운명의 날 오전. 신필름 사무실에는 황남 전무만 있었다. 황 전무는 이광수 원작의 영화 ‘꿈’에서 최은희와 함께 주연을 맡은 적도 있는 연기자 출신이다. 신 감독과는 친구 사이였고, 신필름의 실질적인 ‘넘버 투’였다. 떠나는 마당에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었다. 그가 곱게 나오지 않을 거라고 각오한 채 말을 꺼냈다. 1962년 여름, 계약상으론 나는 확실히 자유의 몸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신 감독님이 안 계셔서 그렇습니다. 극동흥업에서 책(대본)이 하나 들어왔는데 출연하고 싶습니다.”

 그는 눈을 치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임마, 여기(신필름) 전속배우가 함부로 나가려 해? 나가면 배신이야!”

 “계약이 끝난 것 같습니다.”

 “뭐, 임마? 미스 한, 계약서 찾아와.”

  황 전무가 골리앗이라면 나는 다윗에 불과했다. 회계 담당 미스 한이 계약서를 가져왔다. 내용을 확인한 황 전무가 계약서를 집어 던졌다.

 “신 감독 올 때까지 기다려!”

 “기다릴 수 없습니다.”

 “이 배신자 같은 놈”이란 소리와 함께 눈에서 불꽃이 번쩍 했다. 황 전무가 따귀를 때린 것이었다. 나 같은 녀석은 안중에도 없었다. 몸을 돌려 문을 나서는 순간, 신필름과 인연은 끝이 났다는 걸 직감했다. 나는 신 감독에게 매달려서라도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해야 했다. 신 감독과 만났더라도 아마, 허락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신 감독이 이후 청춘영화 시대가 올 것으로 예상했다면 내게 다른 제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훗날 신 감독의 영화 스타일을 보아도 그런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신필름은 내게 고향, 그 자체였다. 그 곳에서 전속배우로 3년간 월급을 받으며 지낸 건 행운이었다. 충무로에서 전속배우를 둘 정도로 자리 잡힌 회사는 신필름밖에 없었다. 신필름은 스튜디오를 두고, 동시녹음이 가능한 독일제 미첼 카메라를 갖추고, 스태프가 타고 다니는 전용버스를 운영하는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앞섰다. 신필름에는 미첼 카메라 한 대와 아리후렉스(Arriflex) 카메라 세 대가 있었다. 내가 굶지 않고, 일류 작가 및 기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도 신필름 덕분이었다.

 “넌 배신자야”라는 황 전무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2층 계단을 내려오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이지 어떤 울음보다 더 큰 통곡이었다. 나를 키워준 신필름에서 배신자로 낙인 찍힌 채 떠나는 아픔이란….

 신필름이 있던 을지로 3가 을지극장 앞 명성빌딩에서부터 극동흥업이 자리한 충무로 중부경찰서 앞까지 울면서 걸었다. 100m가 채 못 되는 거리였다. 눈물이 비 오듯 흘렀지만 닦지 않았다. 남들이 보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중부경찰서 앞에 오니 정신이 번쩍 났다. 뒷골목에서 눈물을 닦고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극동흥업에 들어갈 순 없지 않은가. 마음을 단단히 하고 2층짜리 극동흥업 건물로 걸어 올라갔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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