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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과 함께 하는 독립유공자 시리즈 ④ 이규갑·이애라 부부

충무공의 후예 가운데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쟁쟁한 독립운동가가 적지 않다. 의병전쟁과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고광 이세영을 비롯, 이규풍·이민호 등은 모두 아산출신으로 나라를 찾는 일에 헌신한 분들이다. 이 가운데 부부가 함께 독립운동 전선에 참여한 이규갑·이애라 선생이 있다.



전국 13도 대표 중 한명, 한성임시정부를 수립한 주역

김정규 기자

도움말=김도형 한국독입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어머니의 뜻으로 시작하다









아산시 영인면 월선리에 있는 이규갑 선생의 가족묘역에서 후손인 이종흔씨가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운호(雲湖) 이규갑(李奎甲, 1888~1970·사진)은 충무공 9대 손이며 아산에서 출생했다.



 한성사범학교와 신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 전도사가 됐다. 한말 의병운동에서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이규갑이 의병활동을 하게 된 데는 어머니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밀양박씨(박안라), 황해도 한미한 집안의 딸로 한문에 조예가 깊어 사서삼경을 통달했다. 예학에도 밝아 이규갑 형제는 서당에 가지 않고 집에서 그녀로부터 글을 배웠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규갑의 어머니는 “사내들이 국난에 집에만 있어야 되겠느냐”고 매일같이 호통을 치시며, 빨리 나가서 의병을 일으키라고 했다. 어머니 말씀에 그의 형인 이규풍(李奎豊)은 서울로 갔고, 이규갑에게도 밤낮없이 의병을 일으키라고 했다. 심지어 아들들이 의병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부모의 뜻을 거역하는 불효막심한 자식”이라고 하며 회초리를 들었다. 그래서 이규갑은 할 수 없이 그의 나이 21세 되던 1908년에 의병에 참가하게 됐다.



‘할 수 없이’시작한 의병활동이지만 그의 행보는 역사를 바꿨다.



한성임시정부 평정관 맡아













‘한성임시정부’는 3·1만세운동이 한참 진행되던 1919년 4월 23일 서울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다. 국민대회의 절차를 밟아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은 3월초부터 홍면희(일명 홍진)·한남수·김사국 등에 의해 비밀리에 추진됐고, 4월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회를 개최해 임시정부를 수립, 국민에게 공포했다.



 이를 위해 이규갑은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회의에 전국 13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해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평정관으로 선출됐다. 인천에서 열린 회의는 4월 23일 열릴 국민대회 개최 준비회의이자 국회의 임무를 대행한 자리였다.



 이규갑은 4월 2일 아침 권혁채·홍면희·안덕상과 함께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역에 도착한 그는 일경의 불심검문을 받았으나 홍면희가 “이 사람은 약장사 하는 사람으로 우리의 일행”이라고 둘러대 위기를 모면했다. 오후 3시 각 단체 대표들이 모였는데, 천도교대표로는 안상덕, 기독교대표로는 박용희·장붕·이규갑·홍면희·권혁채·김규 등 10여 명 남짓 참석했다. 13도 대표자들은 앞서 제정한 약법(約法)과 임시정부기구 및 각원명단, 국민대회취지서 등을 통과시켰다.



 한성정부를 선포한 후 이규갑은 국내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첫째 한성정부를 조직하였기 때문에 해외로 나가 국제무대에서 외교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의병활동 경험이 있기 때문에 만주로 가서 독립군이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에 그는 한성임시정부 조각명단과 국민대회취지서 등을 갖고 4월 중순 평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북 용천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갔다. 이규갑은 안동현을 지나 1919년 4월 20일경 상해에 무사히 도착했으나 이미 그곳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돼 있었다.



 그는 상해정부의 대표격인 도산 안창호와 머리를 맞대고 두 정부의 통합에 골몰했다. 이규갑은 상해정부가 한성정부보다 먼저 조직됐기 때문에 한성정부가 상해정부에 합류돼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안창호는 상해정부가 쟁쟁한 독립지사들이 만든 조직이라 하더라도 한성정부는 국내에서 13도 대표들이 모여 국민의 총의에 입각하여 만든 정부이니 상해정부를 해체하고 한성정부의 법통에 순응해야 한다고 했다.









1963년 김좌진 장군 추모식에 참석한 이규갑(왼쪽에서 세번째)선생이 김두한 등과 기념촬영했다. [중앙포토]







 이규갑은 “특히 밝혀둘 것은 필경 우리는 한성정부를 해외 망명정부로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임명한 각원들도 전부 그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애국지사들로 충당했다”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뜻을 모아 이규갑은 임시의정원의 충청도 대표가 돼 명실공히 통합정부로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탄생시킨 것이다.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성은 ‘한성정부’에 두고 있다. ‘한성임시정부’를 탄생시키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이규갑이다.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재무부장직을 맡았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문교·사회분과 위원장을 지내는 등 국가발전에도 크게 공헌했다. 56년 충국열사기념사업회 회장, 59년 대한기독교 반공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함께 독립운동을 벌인 부인 이애라의 일대기



독립운동, 애국부인회 결성 … 20대에 숨을 거두다










운호 이규갑 선생의 장례식 모습. [중앙포토]

















부인 이애라(사진) 또한 독립운동가다. 그녀는 1894년 1월 서울에서 이춘식의 셋째 딸로 태어나,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이화학당의 교사로 근무하던 중 독립운동가인 이규갑을 만나 20세에 결혼했다. 남편 이규갑과 함께 공주 영명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1917년 평양의 정의여학교로 전근하면서 이규갑도 평양기독병원의 전도사가 됐다.



 1919년 1월 독립운동 동지들의 연락을 받았다. 이규갑과 이애라는 1남 2녀 중 젖먹이인 막내딸만 안고 서울에 올라왔다. 이규갑은 서울의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선언한 후 그 후사를 맡아 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남편 동지들과 합류했던 이애라는 3·1운동의 지방조직을 만들기 위해 충청지방과 수원지방을 전전하다 남편을 찾기 위해 상경했다. 하지만 남편을 찾지 못하고 서울 아현동 친정으로 가던 중 일본 헌병에게 어린 딸을 빼앗겼다. 당시 일본 헌병은 백일이 갓 지난 아기를 빼앗아 길에 내 동댕이쳐서 즉사케 하고 그녀를 체포했다. 이애라는 아기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일경에 잡혀갔고, 이 때 뒤에 물러 서 있던 유득신 권사가 아기를 안았으나 아기는 이미 목숨을 거뒀다.



 이애라는 감옥을 나온 이후 수원과 공주, 아산 등의 지방교회를 다니면서 애국부인회를 결성하는 등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그러다가 공주에서 다시 일경에 붙잡혔다. 남편의 행방을 추궁하는 일경의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나 아산에서 잠시 몸을 추스린 뒤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시숙인 이규풍이 거주하는 러시아행을 결행했다. 1921년 그녀는 두 아이를 데리고 서울에서 경원선 열차를 타고 원산에 도착한 뒤 선로를 이용해 함경북도 웅기항에 다다랐으나 배에서 내리자마자 검문하는 일경에 다시 붙잡혔다. 그녀는 경찰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의사의 도움을 받아 두 아이와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피신하였다.



 이규갑은 아내와 아들이 형님댁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형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이규갑은 피골이 상접한 아내 이애라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수년 만에 남편을 만난 이애라는 겨우 며칠을 함께 지낸 후 이역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이애라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블라디보스톡에서 남편을 만 난지 수일 만에 “이제는 어디 가지마오. 내가 두 무릎으로 걸어서라도 당신을 도우리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이규갑 선생이 남긴 글과 묘소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규갑은 『신동아』 1969년 4월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글속에서 그의 삶과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첫째 나는 죄인이다. 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제 영토를 영유하지도 못하고 있으며, 수많은 동지들을 내 손으로 무고하게 희생시켰으니 그런 불충이 없다. 나는 나라에 죄인이다.



둘째 나는 문중의 죄인이다. 나로 인하여 내 처가 죽고 자식이 죽고 친족 7명이 죽었다. 나 때문에 문중에서 왜적에게 죽은 사람만도 9명이나 되니 선영에 그런 작죄(作罪)가 있겠는가.



셋째 나는 내 신체에 대한 조인이다. 부에게서 받은 소중한 내 몸을 나는 무수히 학대했다. 왜적에게 잡혀 감옥행을 한 것만도 33회나 된다. 끔찍한 고문도 많이 당하고 매도 많이 맞아서 지금의 내 노구(老軀)는 성한 데라고는 없다. 이 또한 불효요 불경이니 나는 내 몸에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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