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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7) 깜짝 생일선물





푸짐하게 내놓은 한 상, 잊고 있던 생일이었다



1963년 신성일씨가 김지미와 함께 주연한 영화 ‘77번 미스 김’의 한 장면. 신필름 신인배우였던 신성일씨도 연기자의 면모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인기도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다.





일기일회(一期一會). 이런 인연이 있을까!



 그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고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전날(1960년 12월 24일) 밤 어울린 다른 일행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과연 이 여인이 사람일까, 천년 묵은 백사가 미인으로 변신한 백사부인이 이 곳에 환생한 것일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알고 보니 그 여인은 시계 무역회사 사장의 둘째 부인으로 나보다 8살 연상이었다. 사장은 그 집에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들렀다. 우리는 하룻밤을 보낸 후 연인으로 맺어졌다.



 62년 접어들 무렵 신필림은 더욱 큰 회사로 변모해갔다. 박정희 정권이 그 해 1월부터 영화법을 제정해 59년 71개에 이르는 영화사 및 군소 프로덕션을 16개로 통폐합시켰다. 군소업자들이 영화를 만들 수 없도록 제한하는, 메이저 컴퍼니 중심의 법안이었다. 신필름은 홍콩에서 200개 이상의 극장을 소유한 거대 프로덕션 란란쇼와 긴밀하게 교류하며 독주했다. 앞에서도 말했듯 신필름에서 신인 신성일의 입지가 점점 좁아졌다.



 우리의 관계는 내가 62년 11월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하면서 변했다. 이 영화를 계기로 나는 하늘을 치솟을 듯한 인기를 타며 엄청나게 바빠졌다. 김지미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77번 미스 김’은 ‘아낌없이 주련다’ 직후 촬영했다. 당연히 자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 여인을 만난다고 해도 혜화동 집에서만 가능했다. 당시 통신시설이 좋지 않았다. 큰 회사나 웬만한 부잣집이 아니면 백색전화(소유자의 이름으로 가설되는 개인 전화)를 구경하기 어려웠다.



 63년 5월 ‘새엄마’를 찍고 있을 때의 일이다. 너무 바쁜 탓에 그 여인과 관계는 유지했지만 잘 만나지 못했다. 엄앵란이 새엄마, 김진규가 아버지, 최지희가 여동생, 내가 아들로 출연한 이 영화는 아들이 새엄마를 거부하는 내용이었다. 촬영장은 서라벌예대 근처 채석장 밑에 자리한 미아리 세트장이었다. 밤 촬영을 위해 서소문 기상척후소 옆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옮길 준비를 하던 차, 나는 막간을 이용해 여인에게 전화를 했다. 뜻밖에, 혜화동 집에 꼭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웬만하면 이런 부탁을 하는 여인이 아니었다.



 미아리 세트장에서 엄앵란의 차를 함께 타고 다음 촬영장으로 이동하던 중 혜화동 로타리에서 내렸다. 거기서 여인의 집까진 250m 거리였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뛰어갔다. 허겁지겁 한옥집에 도착하니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여인은 방에 한 상 푸짐하게 차려놓은 채 날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오늘(5월 8일)이 생일이죠.”



 나도 몰랐던 생일상이었다. 가슴에서 찡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 여인은 내 손을 끌어당겨 영화 소품으로 차고 있던 세이코 가죽 손목시계를 끄른 뒤 새 시계를 채워주었다. 금빛이 번쩍거리는 롤렉스 콤비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구경할 수 있는 최고의 시계였다. 그 여인은 원래 차고 있던 학생용 손목시계를 문 밖으로 내던졌다. 나는 그 집을 떠날 때 손목시계를 주어갔다. 영화 소품이라 잃어버리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5월의 해는 짧지 않았다. 촬영 현장은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나만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 다른 배우들은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아들이 술 먹고 집에 들어가는데 새어머니와 여동생이 문을 열며 마중 나온 촬영 장면이었다. 그 때 갑자기 엄앵란과 최지희가 날 보더니 배를 잡고 깔깔거리는 게 아닌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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