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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닿지 않으면 다가가라, 콘크리트 천장도 뚫린다”

‘다양성(diversity)’은 미국 사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다. 여러 인종·종교·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통합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소수자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을 펼치는 등 누구도 성별·인종·장애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도록 노력한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사회의 ‘주류’는 있다. 유색인종보다 백인이, 여성보다 남성이 다수의 기득권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마이너리티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공한 이들은 여전히 미국 사회의 귀감이 된다.

세계 최대 제약사 화이자의 프레다 루이스홀 부회장

세계 최대 다국적 제약회사인 화이자의 최고의학책임자(Chief Medical Officer) 프레다 루이스홀(Freda Lewis-Hall·56·사진) 수석부회장도 그런 경우다. 고교 시절 진학담당 교사로부터 “가정주부가 되는 게 낫겠다”고 권유받은 흑인 여학생은 보수적인 미 의학·의약계와 세계적인 기업의 리더가 됐다.

포브스 우먼(Forbes Woman)의 ‘젊은 여성을 위한 과학 분야 롤모델 15인’에 선정되며 미국에서 대표적인 여성 롤모델로 꼽히는 그를 13일 만났다. 루이스홀 부회장은 존스홉킨스대를 거쳐 하워드(Howard)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교에서 정신과 의사로 근무하다 제약사 엘리릴리 등을 거쳤고, 2년 전 화이자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 방한은 ‘아시아 임상시험의 허브’가 된 한국화이자의 연구개발 현황을 둘러보고 직원들을 만나기 위해 이뤄졌다.

-최고의학책임자는 어떤 일을 하는 자리인가.
“전 세계 화이자의 안전성 전략, 임상시험, 의료 관련 대외 커뮤니케이션 등을 총괄한다. 환자들이 우리의 의약품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전반적인 가이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병원에서도 근무했는데, 왜 현장을 떠나 제약회사에 들어갔나.
“내가 의사가 된 건 사람들을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약회사에서 혁신적인 신약을 만들고, 의약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수백만 명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현재 어떤 신약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나.
“비흡연자들에게 발생하는 비소세포암 치료제가 있다. 발암(發癌) 유전자를 차단하는 타깃 항암제다. 한국에서 임상시험이 주도적으로 이뤄졌고, 그 덕에 현재 전 세계 수많은 환자에게 희망을 주게 됐다.”

-성공한 여성이다. 자신의 어떤 점이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나.
“환자들에 대해 애정을 갖고 늘 열심히 일했다. 무엇보다 ‘할 수 있다’는 자세(can-do attitude)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도전이 주어졌을 때 긍정적으로 최대한 밝은 면을 보면서 최선을 다하는 거다.”

-좋은 얘기이지만 교과서적인 말 같다.
“개인적인 얘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난 가족에게서 배웠다. 소아마비로 하반신이 마비된 삼촌이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다. 장애를 가졌지만 삼촌은 뭐든 혼자 해내려 했다. 가족들도 그가 소외되거나 뒤처지지 않도록 했다. 삼촌은 재단사가 됐고 기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됐다. 삼촌은 늘 ‘손에 닿지 않을 땐 가까이 다가가라(When things seem out of reach, move closer)’고 말했다. 결국 자신의 묘비에도 새겨진 이 말은 일단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됐다.”

-그래도 살다 보면 혼자 힘으로는 벅찬 일들이 생긴다. 해도 안 될 때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있기 마련이다. 의대 1학년 때,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학교의 여러 유명한 의사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그를 낫게 할 수 없었다. 정말 절박했고 노력했지만, 결국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를 구할 순 없었지만 나의 노력이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려운 상황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으로 마이너리티여서 겪은 어려움은 없었나.
“고교 때 진학상담 교사를 찾아갔을 때다. 부모님은 모두 대학을 나오지 못하셨기 때문에 진학에 도움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교사가 내게 권해 준 직업은 ‘아내’였다. ‘예쁘고 성격도 좋으니까 해군 장교의 아내가 되는 게 어떻겠느냐’는 거였다. 나보다도 어머니가 엄청나게 화를 냈다. 그러고는 서점에서 미국 최고의 대학 리스트가 실린 잡지를 사 오셨다. 어머니와 내가 직접 준비해 지원한 거다. 난 좋은 방법인지 반신반의했지만 그렇게 해서 존스홉킨스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혼자서 해
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라는 게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교사가 왜 그런 조언을 했을까.
“그때는 1970년대 초였다.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직에서 일하는 흑인 여성은 거의 없던 시절이다. 그 당시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었을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어땠나.
“쉽지 않았다. 흑인이면서 여성인 나를 가르치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교수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열심히 공부했고 예과를 1년 조기 졸업했다. 그런데 본과 입학 허가를 받지 못해 잠시 다른 일을 해야 했다.”

-이번에도 스스로 해결했나.
“당시 워싱턴DC의 한 정부기관에서 일을 했는데, 길 건너편이 하워드대였다. 어머니가 ‘왜 학교로 찾아가 물어보지도 않느냐’고 물으시더라. 그 말대로 했고, 그해 8월 진학하게 됐다. 성적도 좋았고 졸업장도 있었지만 나한테는 용기가 없었다. 어머니의 응원 덕에 바로 다시 공부하게 된 것이다. 현명하면서 용감하라(wise and bold). 늘 본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는 ‘유리천장(glass ceiling)’이 아니라 ‘납땜한 콘크리트’를 지나온 것 같았다. “X선 투시를 해도 볼 수 없을 만큼 꽉 막힌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유리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나은 형편”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도 여성들이 비슷한 어려움이 있다. 요샌 많이 바뀌었는데, 여전히 고위직으로 올라가긴 어렵다.
“목표를 높게 잡으라고 말해 주고 싶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분명한 목표를 갖고 어떤 능력과 경험, 리더십이 필요한지 이해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냥 해라.”

-하지만 여성들에겐 일과 가정 사이의 균형이라는 숙제가 있다. 무작정 하는 게 쉽지 않은데.
“나도 매일매일 어려운 결정을 해야 했다. 말로는 늘 가족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지만 지나치게 일에 몰두했다는 생각이 든다. 젊었을 땐 일과 내 삶의 균형을 잡지 못했던 것이다.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일을 덜 하거나 남의 손을 빌리라는 얘기인가.
“둘째를 출산했을 때다. 오전 4시43분에 아이를 낳았는데, 그날 오후 9시에 응급실에서 호출이 왔다. 어쩌겠나. 환자를 보러 가야지. 이뿐 아니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을 위해 컵케이크를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는 사서 먹였어도 괜찮았을 텐데’라고 생각한다. 늘 내가 중심에서 영웅이 될 필요는 없다. 때로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중요하다.”

-마이너리티를 위해 필요한 환경은 어떤 게 있을까.
“여성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보이지 않는 편견을 해소할 수 있도록 교육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건 조직 안에서 롤모델을 보여 주는 거다. 화이자의 경우 최고경영진 중에 나 말고도 여성이 여럿이다. 법무, 신규사업 총괄, 대외협력 담당 최고위직이 모두 여성이다.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이 가장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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