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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남경에서





중국 내륙 답사 도중 남경(南京)에 도착했다. 전국(戰國)시대 초(楚)나라 때는 금릉(金陵)이라 불렸던 유서 깊은 고도(古都)다. 명나라 개국 시조 주원장(朱元璋)이 고려 공민왕 17년(1368) 칭제(稱帝)하면서 남경으로 개칭했고, 조선 세종 3년(1421)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할 때까지 수도였다. 현재는 1937년 일본군이 자행한 남경 대학살의 현장으로 유명한데, 우리에게는 중원 정벌을 둘러싸고 개국 초의 조선과 숱한 갈등을 겪었던 도시라는 의미가 있다.

 정도전은 1392년 10월 사신으로 남경까지 왔다가 이듬해 3월 귀국했다. 그해 5월 주원장은 사신을 보내 “사람을 요동으로 보내 포백(布帛)과 금은으로 우리 변장(邊將)을 꾀었다… 어찌 고려에서 급하게 병화(兵禍)를 일으키는가”(『태조실록』 2년 5월 23일)라면서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했다. 급기야 주원장은 태조 5년(1396) 2월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表箋文)’에 “희롱하고 모멸하는 문구가 있다”면서 정총(鄭摠)·노인도(盧仁度)·김약항(金若恒) 세 사신을 억류하고 정도전 압송을 요구했다. 태조 6년 11월 정총·노인도·김약항이 사형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조선은 격분한다. 신덕왕후 강씨의 사망 소식을 듣고 명 태조가 내려준 옷 대신 상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사형당했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정도전이 지나간 옛일에 외이(外夷)가 중원(中原)에서 임금이 된 것을 차례로 들어 논했다”(『태종실록』 5년 6월 27일)는 기록처럼 이성계와 정도전은 중원정벌을 결심했다. 태조 7년(1398) 왕자의 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정도전이 살해된 후 태종 2년(1402) 명나라는 내사(內史) 양영(楊寧)을 사신으로 보내 “김약항은 운남(雲南)으로 귀양가서 아내를 얻어 살고 있고, 정총과 노인도는 병들어 죽었다”(태종 2년 10월 16일)고 변명했다. 실제 병사했는지 사형당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 사신은 끝내 불귀의 객이 되었고, 조선은 중원정벌의 꿈 대신 사대를 외교정책의 대강으로 삼았다.

 김약항은 사신길에서 “여관은 어찌 이리 쓸쓸한가…/해 저문 뒤 새소리 시끄럽네/타향의 봄은 쓸쓸하니/백 가지 생각에 홀로 난간에 기대노라(旅舘何寥落……/日斜飛鳥喧/異鄕春寂寂/百慮獨憑軒)”라고 돌아오지 못할 길을 노래했다. 주춧돌 몇 개만 남은 명(明) 고궁(故宮)에선 600년 전의 흔적조차 찾을 길 없기에 나그네의 마음이 더욱 심란하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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