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워드피디아 5-스마풀리안] 나는 의존한다, 고로 나는 사라졌다





#1. 점심 시간 서울 광화문의 한 백반집. 직장인 3~4명이 테이블에 앉았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메뉴를 주문하더니 이내 침묵이 흘렀다. 한 사람은 아이폰을 꺼내 인터넷 서핑을 하고, 다른 사람은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머지 일행의 시선은 TV에 꽂혔다. 음식이 늦게 나오자 인터넷 삼매경이던 사람이 물었다. "어, 나 메뉴로 뭐 시켰더라?"

#2. 직장인 김영수(가명)씨는 퇴근 후 서둘러 내비게이션을 수리센터에 맡겼다. 이번 주말 동료 결혼식에 가야 하는데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큰일이다. 종이로 된 지도책 보단 알아서 ‘좌회전, 우회전’ 길을 알려주는 ‘인간 친화형’ 기계가 더 든든하다.

#3. 주부 이은정(가명)씨는 마트에 갔다 휴대 전화를 가져오지 않아 당황했다. 갤럭시S 메모장에 장 볼 목록을 적어놓았던 터다. 아무리 떠올려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종이 메모장 보다 편해 자주 이용했는데 막상 목록을 떠올리자니 기억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스마트한 기기들이 넘쳐나고 있다. 스마트폰은 기본이고 태블릿PC 한 대쯤은 가져야 체면 차리는 시대다. 길은 내비게이션이 알아서 찾아주고, 집에 켜놓고 나온 전등도 원격조종 버튼 한 방으로 끌 수 있다. 냉장고는 알아서 온도를 적절하게 조절해주고 TV도 예약녹화는 기본에 주인공이 입은 옷 정보까지 알려주는 세상이 됐다.

그러나 스마트한 세상에 부작용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계가 똑똑해지는 바람에 사람은 생각을 멈추게 된 것이다.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거나, 기기에 지나치게 의존해 바보가 되는 ‘디지털치매(Digital dementia)’ ‘스마트 치매(Smart dementia)’란 말도 생겨났다. 똑똑한 기계가 알아서 해주니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 바보, 즉 ‘스마풀리안(Smarfoolian)’이 돼가는 것이다.

①전화번호를 기억하는 것 보다는 휴대전화에 입력한다. ②문서나 글은 모조리 컴퓨터에 저장한다. ③운전 경로를 기억하는 일은 내비게이션에 맡긴다. ④노래방 기기 없이는 좋아하는 노래를 부를 수 없다. ⑤중요한 기념일이나 회의 일정은 스마트폰이나 PDA가 챙겨줘야 한다. 적지 않은 항목에 체크를 했다면 당신은 스마풀리안 일지 모른다.






◇스마트에 중독된 잠재적 위험자 급증=혁신적이고 똑똑한 기기는 1980년대부터 논쟁거리였다. 80년대 후반 미국 학교에서는 수학시간 학생들에게 휴대용 계산기 사용을 허가하는 문제를 두고 거센 논란이 일었다. 지루한 계산에서 벗어나 원리를 더 깊이 이해하는 쪽으로 수학교육의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의견과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 수 있다는 의견이 팽팽했다. 이 문제는 현재 우리나라 교육계에서도 뜨겁게 논의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모 대학 경제학과 교수는 회계사(CPA)를 준비하는 학생을 말렸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워낙 잘 돼서 회계사가 할 일이 지금도 없지만,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학생의 장래가 스마트시대에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스마트 기기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시작됐다. 중독과 망각 등 부작용이 심각해 지면서부터다. 지난해 11월 방송통신위원회와 한국인터넷진흥원이 스마트폰 이용자 210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이용 실태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 평균 1.9시간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58.2분 동안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일에는 점심 시간대(33.4%)와 퇴근시간 대 ‘18~19시’ (33.6%), ‘19~20시(31.3%)'에 이용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하루 24시간 중 수면 시간과 업무 시간을 제외한다면 일상 중 꽤 많은 시간을 스마트폰에 빠져 산다는 이야기다. 적지 않은 이들이 불안과 초조, 불면에 시달려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는 잠재적 위험 사용자로 나타났다.

인간은 왜 기기에 중독되고 있을까. 사람 뇌 용량은 한정돼 있다. 그러나 정보는 계속 쏟아진다. 감당 못할 정도로 쏟아지는 정보는 스트레스다. 기억하기 버거워서다. 기기를 찾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다 점점 기기에 빠져든다.

◇"나는 의존한다, 고로 나는 사라졌다"=기기에 의존하다 보면 기억력뿐 아니라 사고 자체가 단순해질 수 있다. 깜빡 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생각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중앙대 김진백 (경영학)교수는 “인간이 웹사이트 검색엔진에 의존할 수록 기억력뿐 아니라 지적 능력, 사고의 틀까지 지배당하는 결과를 낳는다”며 “이는 전화번호를 잘 기억하지 못하거나 길을 찾지 못하는 건망증보다 심각한 차원”이라고 우려했다. 철학자 데카르트의 오랜 명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언젠간 "나는 의존한다, 고로 나는 사라졌다"로 대체될지도 모른다.

디지털 질병엔 아날로그 감성 처방이 제격이라고 한다.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윤대현 신경정신과 교수는 "디지털치매는 뇌세포가 죽어 없어지는 치매의 의학적 정의와는 다르다. 그러나 뇌를 사용하지 않으면 뇌세포 퇴하를 가져온다는 점에선 동일한 범주에 있다"고 말했다. 기기에 너무 의존하다 보면 치매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빠르고 즉각적인 디지털 세상은 '사람'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나 진심 어린 위로가 없기에 자칫 우울증을 낳을 수 있다"며 "세상과 사람을 한 템포 느리게, 진심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아날로그 감성이 디지털 세상의 명약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였던 인간은 점점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원시 인간으로 퇴화할 지 모른다. 천적이 없어 나는 방법을 잊어버렸던 도도새가 지금은 멸종된 것처럼.

김진희 기자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