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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이순신의 죽음





이순신은 선조 31년(1598) 11월 19일의 노량해전에서 전사했지만 피할 수도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그해 8월 18일 병사해 철군령이 내려졌다. 『선조실록』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磷)에게 많은 뇌물을 바쳤다’고 전한다. 그냥 보내달라는 뜻이었다. 『이 충무공 행록(行錄)』은 진린이 보내주자면서 ‘황제가 하사한 장검이 있다’고 협박까지 했으나 이순신은 “한번 죽는 것은 아깝지 않다”고 거절했다고 전한다. 이순신은 전날 밤 자정 하늘에 ‘이 적을 제거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此讎若除 死則無憾)’라고 기도했다. 도망가는 적을 향해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이순신은 용감했지만 무모한 장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은 ‘이순신은 친히 북채를 들고 함대의 선두에서 적을 추격했고, 선미에 엎드려 있던 적들이 순신을 향해 일제히 조총을 발사했다’고 마치 표적을 자청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선조실록』은 좌의정 이덕형이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보고하자 선조는 “대첩을 거두었다는 설은 과장인 듯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한다. 선조는 전에도 이순신이 무군지죄(無君之罪)를 비롯해 네 가지 죄를 지었다면서 ‘이렇게 많은 죄가 있으면 마땅히 율에 따라 죽여야 한다(『선조실록』 30년 3월 13일)’고 말한 인물이었다. 이순신 자살설이 나온 이유는 종전이 가시화되면서 이순신을 천거한 유성룡(柳成龍)도 공격받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전시에 영의정 겸 도체찰사 자격으로 천민도 양반이 될 수 있게 한 면천법(免賤法), 양반도 군역의무를 지는 속오군(束伍軍), 부호가 세금을 더 많이 내게 하는 작미법(作米法: 후의 대동법) 등을 실시해 조선을 위기에서 건졌다. 종전이 기정사실이 되자 양반들은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옛 조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유성룡 제거에 나섰다. 『서애(유성룡) 연보』는 유성룡 공격 소식을 들은 이순신이 실망해서, ‘시국 일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는가’라고 탄식했다”고 전한다. 이순신이 전사한 날 유성룡도 파직 당한다. 두 인재를 죽이고 조선은 다시 사대부의 천국으로 되돌아갔다. 우리 역사의 긍정적인 면뿐 아니라 인재들을 죽이는 방식으로 기득권을 유지해 왔던 우리 역사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도 깊게 성찰할 때다. 지금은 이런 어두움이 사라졌는가?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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